지혜 있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다. 일반적인 통찰력은 어떤 사물과 일을 볼 때 전체와 근원을 살핌인데, 원불교의 지혜는 전체와 근원뿐만 아니라 나타난 모습, 진행의 경로, 입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일컫는다. 나아가 길고 너른 은혜를 창출할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즉,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를 분별이자 통찰력의 근간으로 삼기 때문이다. 원불교 수행자는 분별할 때 비움에 의한 대소유무의 안목을 지니고자 노력할 뿐만 아니라, 깊이를 더해가며 본능이자 습관으로 자리하기까지 길들여가고자 노력한다.

대소유무의 통찰력은 삶 속에서 시비이해(是非利害)로 구체화된다. 대소유무에 의해 그대로 발현되면 그 판단은 옳음(是)이 되고, 그 삶은 자타 간에 이로움(利)을 선사한다. 반면 대소유무에 의하지 않고, 관념과 욕심과 잘못된 습관에 의해 발현되면 그름(非)이 되고, 그 삶은 해로움(害)으로 다가온다. 대소유무에 의한 옳고 이로운 삶을 살다보면, 마음과 행동의 습관으로 자리하여 하나의 업(業)이라는 패턴을 이뤄 선업(善業)이 된다. 악업(惡業)이란 그 반대로 역리의 삶이다. 즉 대소유무에 의해서 시비이해가 건설되는데, 습관이 깃들며 업력으로 반전한다. 이것이 선악업보(善惡業報)다.

업보는 습관에서 형성되지만, 선악의 차별은 어떤 습관을 길들이냐에 있다. 습관의 원동력은 왠지 모를 이끌림과 좋아함이다. 이유 없이 끌림의 대부분은 전생의 업과 동물로서의 호르몬작용에 의한 것이라면, 좋아함의 대부분은 인정을 받거나 어떤 보상을 얻는 데에 있다.

이끌림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주위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면면을 바라보면 자기가 진정 좋아서 하는 것보다는 주위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들이다. 잘 생긴 외모, 명문대, 대기업과 전문가, 부의 축적, 권력, 명예 마저도 사회적 관념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남이 좋다면 나도 좋다는 착각은 결국 자아의 상실로 가져오지만, 상실을 느낄 정도만 되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사회구성의 기본은 다양한 역할의 조화에 있듯이 다양함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는 이끌림과 좋아함이다. 이끌림과 좋아함의 특성이 부조화의 괴팍함으로 발전하지 않고 선업으로 이어지려면, 대소유무에 의한 조화로움으로 습관을 길들여가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좋아함과 해야 함의 균형이다. 세상살이는 좋아하는 것만으로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좋아함이 해야 함의 룰을 깨지 않는 연습을 하다가, 해야 함을 좋아함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엔 익숙하지 않지만, 하고 또 하다보면 편안함을 넘어서 즐길 수 있는 데에 이르러 삶 자체가 행복임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삶은 선업을 쌓는 원동력이자, 세세생생 바탕이 되는 심성과 기질이 진리와 더불어 함께한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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