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교무의 '반야바라밀다심경'

▲ 향엄지한선사
'형상 없는 것을 공이라 하고, 형상 있는 것을 색이라 한다(無形曰空 有形曰色)'고 했다. 공을 형상이 없는 것이라 했다.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으며, 그릴 수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다. 반면에 색은 형상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 볼 수도 있고, 잡을 수도 있으며, 그릴 수도 있고, 말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정반대의 현상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하였을까?

먼저 단어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공색(空色)은 누차 말을 했음으로 놓아두고 불이(不異)와 즉시(卽是)를 알아보자면 불이는 ① 다르지 않는 것, ② 특별성(特別性)이 없다. ③ 특별한 것은 아니다. ④ 가운데 주(住)하고 있는 것. 즉시는 ① 이와 같다. ② '곧…이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공과 색은 '다르지 않고, 특별성(特別性)이 없으며,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가운데 주(住)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공과 색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과 색, 색과 공은 다른 것이 아니며, 공과 색, 색과 공은 곧 같은 것이니 다르지 않으면 같은 것이요 같은 것이면 다르지 않다.

서울에 63빌딩이 있는데, 무엇으로 지어졌느냐고 묻는다면 철근, 벽돌, 유리, 시멘트 등등으로 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원래 없는데서 나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63빌딩은 색(色)이요, 없었던 것은 공(空)이다. 즉 공이 드러나면 색이 되고 색이 숨으면 공이 되며, 색이 흩어지면 공이 되고, 모아지면 색이 되는 것으로 상황만 변하고 바뀔 뿐 다르지 않고 바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고 큰 산이 백두산(白頭山)이다. 이 백두산이 처음부터 큰 산으로 있었는가? 아니다. 이는 먼지의 쌓임이다. 이 먼지는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극미(極微)이며 초소립자(超素粒子)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둘 모여 태산을 이루게 된다. 이도 또한 원래 없었던 것이 있음을 이루게 되었을 뿐 근원(根源)이나 체성(體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는 것은 우주 만물 중,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형상 없는 것(空)은 형상 있는 것(色)과 서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형상 있는 것은 결국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고 모두 다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색불이공(色不異空)이다. 비록 형상이 없어졌다할지라도 다시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공불이색(空不異色)이다.

즉 공(空)이란 형상 없는 본래자리이다. 색(色)이란 형상 있는 현실세계를 말한다. 우주 만유는 불생불멸의 진리를 따라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없는 것으로 바뀌고, 형상 없는 것은 다시 형상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형상 없는 것이 형상있는 것을 이루고, 형상 있는 것이 굴러서 형상 없는 것을 이룬다(空轉成色 色轉成空).

색즉시공 (色卽是空)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상 있는 세계가 원래 영원불멸한 실체가 없고, 다른 인연을 빌려서 잠시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므로, 색이 곧 공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에서 다시 색이 나타나므로 공즉시색이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같은 뜻이다.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색즉시공은 유(有)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뜻이라면 공즉시색은 무(無)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나 무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참 진리 곧 중도(中道)에 이를 수 있다. 얼음을 보고 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반면에 물을 보고 얼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역시 없다. 그러나 얼음이 물이요 물이 얼음이다. 또 수증기를 보고 물이라는 사람 없고, 물을 보고 수증기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수증기가 물이요 물이 수증기이다. 얼음이든 수증기든 물이든 간에 결국은 실체(實體) 없는 것이므로 공(空)이요, 공의 영자(影子)로 나투어진 것이 색이다.

이렇게 둘이 아닌 것들이 형상으로 나타날 경우 이를 색(色)이라 하고, 이 색이 인위적인 해체를 통해서 없어지든, 아니면 자연적으로 없어지든 간에 사라지면 바로 공(空)이라고 할 수 있다.

수·상·행·식(受想行識)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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