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생의세의 한 길

'심화(心和)·기화(氣和)·인화(人和)의 생활신조로 일관한 공부인. 일생을 교단의 산업전선에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정신을 구현하며 교단의 경제적 자립을 튼튼히 한 덕산 조희석(德山 趙희錫, 1910~1978) 대봉도.

그는 42년의 교역생활을 사업계에서 활약했다. 교단의 창립초기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의 대표적 산업기관은 보화당과 수계농원이었다. 보화당은 원기19년 대종사가 참관한 가운데 도산 이동안 선진과 공산 송혜환 선진의 발의로 설립됐다. 최초 운영 책임은 일산 이재철 선진이 맡았고 이어 이동안, 송혜환, 조희석 선진이 책임을 맡아 교단 제 1의 산업기관으로 육성했다.

덕산대봉도는 천성이 온건하고 선량했다. 한문사숙과 보통학교를 거쳐 농업기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20대 무렵에 변화 없는 농촌생활의 답답함과 무의미함이 밀려왔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불교, 기독교 등 종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때 불법연구회에 다니던 이건양씨가 〈불법연구회 취지규약서〉를 주었다. 읽어보니 내용이 간결하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빙장어른의 종재식이 총부에서 있어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불법연구회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됐다. 그 해 겨울 선비를 마련해 동선에 참석했다. 대종사로부터 〈대종경〉인도품 1,2장에 있는 도(道), 덕(德)에 대한 법문을 듣고 환희용약 하여 제생의세 하리라는 다짐을 했다.

25세 되던 원기21년 출가를 서원했다. 대종사께서 "앞으로 우리는 교화·교육·자선 등 교단적으로 여러 사업을 해야 하니 희석이는 보화당에 가서 일하라"는 말씀을 듣고 이리보화당으로 갔다. 그는 공부와 사업을 둘로 보지 않았다. 사업계일수록 수양에 바탕한 덕으로 신뢰받는 사업인이 돼야한다는 철학으로 호남 굴지의 한약방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의 혼란 중에는 서무부장과 재무부장직을 맡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심화·기화·인화의 표준으로 헤쳐 나갔다. 원기 37년 제1대 성업봉찬 때는 대종사 성탑과 성비 건립을 진두지휘하며 보은의 도리를 다했다. 원기 47년에는 수위단에 피선되어 교단의 얼로서 주법을 보좌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월거십이우신년(月去十二又新年)/ 인생무상역여연(人生無常亦如然)/ 중생제도기춘추(衆生濟度幾春秋)/ 영기소지본자연(靈氣素地本自然). 한 달 두 달 열두 달이 또 새해가 되었구나. 인생살이 무상함도 또한 그와 같아라. 제생의세 그 한길 몇 해나 되었든가. 영묘한 그 기운 바탕은 본래 자연 그대롤세.

영육쌍전, 이사병행으로 활불도량의 실현에 정성을 다한 그가 남긴 유작시다. 42년 교역의 걸음걸음마다 일원화가 되어 후인들은 그를 호덕지인(好德之人)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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