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교무의 '반야바라밀다심경'

▲ 향엄지한선사
어떤 것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색이란 형상(形相)이 있는 사물을 가리킨다. 형질(形質)의 색을 포괄적으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를 말하는 것으로 견고하고 습하며 따뜻하고 움직이는(堅濕暖動) 성질로 사람을 예를 들자면 사람의 몸을 '색신(色身)'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을 공(空)이라고 하는가? 불교적인 해설로 '있는 게 아니다(非有)' 즉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非存在)'라는 것이 기본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불교의 각 시기나 각 파(派)에서 해석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

원시불교에서는 공이란 불교이론 체계 가운데 보통개념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 시기는 하나의 개념이 이루어져가는 시기로 당시에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 시기는 〈반야경〉계통의 대승사상이 태동하여 발전해가는 시대로 공으로써 이론의 기초를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공을 나누어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둘을 이야기 한다. 아공은 일체 유정이 조성된 것은 각각 원소(元素)의 취합으로 이루어져서 끊임없이 생멸유전(生滅流轉)을 하는 것으로 존재가 주재(主宰)하는데 주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소승불교의 관점이다. 또한 법공은 일체 사물이 일정한 인연이나 조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본신(本身)에 어떤 성질도 없다고 규정을 한다. 다만 법공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묘술(描術)할 수 없는 실재(實在)로 '묘유(妙有)'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대승의 중관(中觀)이다.

공색(空色)에 대해서 '형상 없음이 공이 된다라 부르고, 형상 있음이 색이 된다고 부른다(無形叫做空 有形叫做色)'하여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이것이라 했다. 또 '형상 없음을 공이라 말하고, 형상 있음을 색이라 이른다(無形曰空 有形曰色)'고 하여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이것이라 하였다.

'색즉시공'은 색은 일체 유형의 물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물질은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것으로 그 당체가 비었기 때문에 '색이 바로 이에 공이라'한다 했다. '공즉시색'은 공성(空性)은 참으로 비었고, 색성(色性) 또한 빈 것이라 만일 공성의 평등을 깨달으면 공과 색이 둘이 아니므로(色空不二)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설했다.

또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의 이 말은 모든 존재가 자성(自性)이 없고 오직 인연이 화합된 것으로 색이란 연기(緣起)의 성(性)이 비었다는 의미이다. 색은 '존재'이요 공은 자성(自性)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인간과 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불변(不變)하고 고정된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공(空)이다. 더욱이 공이면서 여러 가지 원인조건에 의해 현상(現象)한다는 《반야심경》의 기본인 공사상(空思想)을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색즉시공'은 모든 것을 공(空)으로 봄으로써 내면의 번뇌와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정적인 사상이며, '공즉시색'은 집착 없는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저마다 작동하여 생생하게 현상하면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리공 공불리색'에 대하여 범어(梵語)의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렇게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했다.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제정하였고 전개시켰다. 그래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본체와 현상, 색과 공 등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觀照)하고 중도(中道)로 조명(照明)할 것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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