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의 원리는 1+1=2가 아니라 1±α=β가 된다. 여기에서 α(알파)는 다양하고 가변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그 원인은 감정이다. 나의 마음과 언행에 따라 영향을 받는 사람이 그 일에서 대해서 물리적인 일만 생각한다면, 되돌려 받는 일도 예측 가능하겠지만, 미묘한 감정이 섞이면 업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다가 업과를 돌려받는 사람의 심법에 따라 다른 β(베타)가 된다.

길을 가다가 면식 있는 사람과 마주치며 어깨를 부딪쳤다고 가정할 때. 첫째, 어쩌다 부딪칠 수도 있지. 둘째, 내가 실수한 거 아냐!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사과하자. 셋째, 쟤가 나와 억하심정이 있나. 넷째, 쟤가 나를 얕잡아보는 거 아냐. 다섯째, 어라~ 나와 한번 해보자는 거야. 이처럼 하나의 상황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가변성을 갖는다. 첫째 행동은 무심으로 주고받음으로써 업(業)의 의미가 없고, 둘째 상황은 원인을 자기에게 돌려보며 상생과 진급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써 오히려 선업의 싹을 틔운다. 셋째와 넷째는 부정적이고 열등감이 가미되었고, 다섯째는 사회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다혈질적 반응으로써 악업의 고리가 형성된다. 이처럼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각적인 반응을 α라면, 상대가 혹 불편한 마음으로 행동했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마저 상쇄하는 둘째의 경우처럼 '?'도 될 수 있으니 α 앞에는 가변적인 '±'가 자리한다.

악업으로 다가오는 것을 받을 때에도 마음가짐에 따라 업이 많이 다르다. 그 하나는 '몰라서 그랬는데 기분 나쁘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표현한다. 둘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 하냐!'고 핀잔을 준다. 셋은, '어라~ 나한테 대들어! 한번 해보자'고 한다. 업도 하나의 경계 속에서 공부일 뿐 별 의미가 없을 수 있고, 업을 더 키울 수도 있는 것처럼 심법에 따라 가감이 되기에, 업과도 β(베타)일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은 주로 '이에는 이'로 주고받는 데에 감정이 더하여서 업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린다.

그러나 정법 회상을 만나 마음 공부하는 사람은 다르다. 인과의 소종래(所從來)를 아는 만큼 죄지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업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보고 진리에 의해 심신 처리함을 우선과제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시대의 인심과 개인의 부득이한 사정에 따라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마음에 거슬리고 불편한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마음에서 최대한 수용할 만큼의 상생과 은혜로 이어가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수행이 깊은 사람은 모든 업을 공부의 경계로 삼고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돌아보아서, 자신의 작은 부분까지 고치고 법답게 키워가는 계기로 삼는다. 업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에 마음을 두니, 같은 업 다른 업과를 받는, 차원이 다른 삶이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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