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뤄야할 과제, 활기찬 교화방안

'교화대불공'은 원기100년 까지 교정핵심정책의 첫 번째에 놓일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5가지 주요과업 중 '교화 인프라 구축'은 현장교화연구 기능 강화가 포함돼있다. 교화는 교화현장이 흥이 날 때 배가된다. 이번 달에는 교화구조개선을 통해 흥이 나는 교화대불공의 활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1주 교당구조조정의 현주소, 2주 교구자치제에 따른 인사순환구조, 3주 교화환경개선에 관해 기획기사를 연재한다.


교당구조조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났다. 팽팽한 찬반양론에도 불구,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는 한목소리다. 조사와 연구, 실험도 해왔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청사진이 없다. 해야 하는 만큼 안되는 이유도 많다. 교당구조조정의 역사와 더불어 구조 조정했던 교당들의 사례를 통해 원인을 분석해본다.

영세교당 설립지양→대형화→공동교화→교화단공동교화

교당구조조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교단 제3대가 시작되면서다. 원기76년 '셋집교당교무초청토론회'에서 개척교당 지원책 강구와 함께 영세교당 통폐합이 거론됐다. 이는 전국에 교당이 빠르게 증가하며 '단독교무'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원기77년 '교단제3대 설계특별위원회'에서 단독교무 문제 해결을 정책 1순위로 채택하며 ▷정책지역 외 교당신설 중지 ▷근접교당끼리 통폐합 ▷단독교무의 공동생활관 합숙을 결정했다.

'면면촌촌에까지 교당이 있게 하자'던 교단은 영세교당 설립을 지양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원기80년 교구자치제가 논의 되면서 양상이 달라진다. 선교소 설립 및 이전 통폐합 등 인허가가 자율화된 것이다. 3년만의 반전이었다. 같은 해 교단적으로 '교당개척운동'이 일어났으며 3월 중앙교구가 14개 교당을 신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기80년대 초반, 교단은 교당통폐합보다 대형화에 관심을 뒀다. 조계사 등 몇 개의 큰 사찰을 중심으로 동네마다 작은 포교당을 둔 불교와 대형화하는 천주교 등을 거론하며 대형교당을 추구했다. 특히 서울회관을 대형교당으로 운영하자는 의견이 높았다.

원기80년대 후반에는 '공동교화'가 교단의 화두로 떠올랐다. 원기89년 부안지구에 지구 내 교무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교화'가 추진됐다. 원기91년 합숙을 시작한 부안지구는 부안교당에서 살며 아침에 각 교당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형태였다.

원기92년은 교당구조조정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계획이 수립된 해다. 교정원은 원기94년까지의 정책으로 교당통폐합과 상징적 대형교당 설립을 제시했다. 교당통합 분야에서는 영암·영보, 봉덕·칠곡이 추진 중이었으며, 반포·서초, 종로·원남·사직 등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리와 어양을 합쳐 2천명 규모의 대형교당을 만들자는 것과 공동교화, 공동인사분야로 전국 70여개 교당·기관들을 29개의 통합체로 추진하겠다고 계획했다. 같은해 10월 중앙교의회에서 교당구조조정 조사에 3억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양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원기93년까지 영양·진보 통합 외에는 성과가 없었다.
▲ 현 부산울산교구 부곡교당은 서동교당과 통합한 지 4년 만인 2009년 6월7일 봉불식을 거행했다.

원기93년 '공동교화지에 통합발령을 낼 수 있다'는 인사방침과 함께 신흥·왕촌·묘량이 묘량교당으로 통합됐다. 서문교당이 성서선교소를 흡수 통합했으며, 앞서 원기90년 부곡교당과 서동교당이 '부곡교당'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재가는 재가대로, 출가는 출가대로 찬반이 팽팽한 가운데 교단은 원기95년 '교화단공동교화체'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생활공동체에 대한 부담을 뺀 교화단공동교화는 남원·도통·보절·산동·수지교당이 시작했다. 원기96년 대전충남교구 서남부권 공동교화, 군산지구 지구공동교화도 추진됐다.

사례로 본 교당구조조정의 한계

초창기 교당구조조정의 문제는 교당불폐쇄의 원칙이나 창립주와의 관계였다. 실제로 창립주가 생존해있는데 교당문을 닫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다. '내 교당이 없어진다'는 교도들의 반대도 대적이다.

원기89년 2명의 교무를 파견하며 추진된 묘량·신흥·왕촌교당은 원기93년 묘량교당으로 통합됐음에도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다. 특히 전무출신 80여명을 배출한 84년 역사의 신흥교당를 묘량에 통합한 것은 아직까지도 반대가 드높다.

현재 매월 1일 왕촌교당에서 합동법회를 보고 15일, 20일, 25일 각각 왕촌과 신흥에서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묘량은 느티나무아동센터로 변모해 방과 후 교실이 운영된다. 통합된 지 6년에 이르지만 '묘량 교도', '신흥 교도', '왕촌 교도'라는 소속감으로 서로의 애경사에 참석하는 일도 드물다.

4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음에도 교도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차로 10여 분 거리인 세 교당이지만 역사를 볼 때 통합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의견도 높다. 세 교당은 각각 다른 성씨들이 오랜 역사를 지켜온 곳이다. 실제로 몇 년 전 원로를 포함한 교무 40여 명이 서명운동을 벌여 이후 '교단일람표'에 각 교당을 기재하고 있다.

원기90년 부곡교당과 서동교당의 통합이 성공한 이유도 두 교당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경제수준은 달랐지만 처음부터 대등한 통합임을 인식시켰고, 통합 4년 만에 새 건물로 이안봉불한 점도 긍정요인으로 꼽힌다.

교당구조조정을 교구의 문제로만 한정짓는 교정원과 교단의 태도도 한계로 평가된다. 원기94년 서문교당이 성서선교소를 흡수통합 하는 과정도 순조롭지 않았다. 통합되고도 회계를 따로 하는 등 진통을 겪는 동안 교단의 행정적인 가이드라인이나 후속조치가 미비했다는 평이다.

5년째로 접어드는 현재 서문교당의 통일감, 소속감은 안정 수준에 올랐다. 성공이 가능했던 것은 서문교당이 38년 역사인데 비해 성서선교소는 문을 연지 불과 4년째로 흡수되는데 반감이 덜했기 때문이다. 최근 젊은 가족들이 입교하는 등 보다 활기찬 분위기다.

교당구조조정의 한계는 교무에게도 드러난다. 많은 교무들이 개 교당 주의를 주장한다. 원기89년 공동교화로 합숙을 시작한 부안지구는 점점 교무들이 생활관에 복귀하지 않아 1년 만에 지구훈련관으로 바뀐 바 있다. 선후배 교무들과의 공동생활이 불편하다는 점, 천도재나 4축2재에 있어 경제적인 문제도 교무들이 구조조정에 미온적인 솔직한 이유다.
▲ 대구경북교구 강북교당은 봉덕·칠곡교당이 통합해 2008년 9월28일 봉불식을 거행했다.

최근 불거지는 교당구조조정에 대한 갈등은 또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교당구조조정 추진의 몫이 재가인지 출가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몇 년 안에 떠날 교무들보다 교당을 계속 다닐 교도들이 의견을 통합하고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발령온 교무가 기존에 추진해오던 구조조정 계획을 번복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왔다.

관계자들은 "1백 교당이면 1백 개의 상황이 다 달라 공통적인 기준을 세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역사가 짧은 교당일 것', '100%는 아니어도 대다수의 공감을 이끌어낼 것', '후속조치나 보완으로 성공모델을 만들어 교도들에게 제시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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