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이 완주군 서방산 봉서사에서 행자로 살 때, 점심 공양할 상추를 씻다가 공중에 뿌리기를 반복하였다.
"상추 가지고 왠 장난이냐!"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났습니다요."

"그럼 네녀석이 불을 끈다는 거냐?"
"그러게 말이지라오."

중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말았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객승이 와 소식을 전했다. 해인사 장경각에 불이 나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서쪽에서 비바람이 몰려와 불이 꺼졌다는 거다.

"그런데 요상한 것은 불난 자리에 상추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있더란 말이오. 거참 별난 일을 다 봤소."
진묵이 봉서사에 사미로 있을 때, 나이가 가장 어리고 행실이 깨끗하므로 조석으로 신중단에 다기를 올리고 향 피우는 일을 맡았다. 진묵이 그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주지의 꿈에 불당의 신장이 나타나 꾸짖었다.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우리더러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를 받도록 하는가. 향 피우는 분을 어서 바꾸어 우리들이 마음 편하도록 해 주게나."
이 일로 하여 주지는 신중단 시중을 다른 사미로 바꾸었으나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다.

진묵은 부설거사(浮雪居士)의 자취를 따라 부안 변산 월명암에서 안거를 났다. 월명암은 부설거사가 창건한 절이다. 여름 안거가 끝나고 다른 중들은 탁발을 나가고 후원 일을 보는 어린 사미와 진묵만이 남았다.
"스님, 상을 보아 놓았으니 때가 되면 잡수세요."

다음 날 어린 사미도 실상사 재를 도와주기 위해 내려가고 진묵 혼자 남았다. 진묵은 방문을 열고 문지방에 한 손을 얹고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다음 날 어린 사미가 돌아와 보니 진묵은 어제 그 모양대로 앉아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사미가 정재간에 가서 보니 어제 차려논 그대로 밥상이었다. 사미가 다시 방 앞으로 달려와서 보니 문지방에 걸쳐놓은 대사의 손은 피멍이 들고 깨져 피가 엉겨 있었다. 바람이 불어 문이 열리고 닫히며 손을 찧어댔으나 대사는 미동도 않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어린 사미가 놀라서 호들갑을 떨자 진묵은 그제서야 눈을 뜨고 쳐다 본다.
"재에 간다더니 어째 바로 왔냐?"
진묵대사는 어제부터 오늘까지의 시간을 완전히 초월해 있었다. 대중들은 대사의 이 입정 삼매를 두고 '능엄삼매'라고 말하였다.

▲ 진묵대사 부도. 부도가 완전히 희어지면 진묵이 다시 오신다는 설화가 있다. 소태산대종사는 원기15년 음력 2월7일에 이곳을 방문하였다.


진묵의 입정 삼매 일화는 봉서사 근방의 암자 상운암에도 남아 있다.
중들이 모두 탁발을 가고 진묵만이 남았다. 한달만에 돌아와 보니 대사의 얼굴은 거미줄이 쳐지고 먼지가 끼어 알아 볼 수 없게 생겼다.

중들이 놀라 황겁히 얼굴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닦아내고 인사를 드리니 그제야 정신을 차려 알아보았다.

"너희들이 어찌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진묵이 익산의 어느 절에서 젊은 중들에게 경론을 설하고 있는데 병색에 짙은 사내가 찾아와 하소연하였다.

"저는 이 밑에 사는 아무개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벌어 늙은 부모와 처자식 생활을 꾸려왔는데 한 달 전부터 병이 들어 일을 못하게 되어 약첩은 커녕 식구들이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대사는 묵묵히 듣다가 벌떡 일어나 불단에 있는 청동 불상의 팔뚝을 뚝 잘라서 사내에게 주었다.
"이것을 팔아서 우선 약을 써 병을 치료하도록 하게."
이를 본 중들은 깜짝 놀라 항의하였다.
"워째 이럴 수가 있다요? 우리는 스님께 더 배울 게 없으니 떠나것심다."

진묵대사가 입을 열었다.
"너거들이 아까까정도 저 사람의 사정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더냐. 하물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팔을 줘서라도 저 사람을 구하였을 것이다. 나는 오직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받아 행할 따름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진묵의 일화를 곧잘 하였다.

"옛날 진묵대사가 미륵사에 있을 때 어느 부인이 생남불공을 하러 왔단다. 진묵은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등상불의 머리를 탁탁 치면서 '애기 태워달라니 태워줘' 서너 번 말만하고 그만 두니 절안의 중들이 그를 망녕들었다고 푸대접하였다. 진묵은 도통한 대사인지라 그때 벌써 등상불은 쓸데없다는 것을 암시하셨지만 일반 승려들은 그걸 몰랐다.

또 진묵대사는 그때 벌써 동정간(動靜間) 불리선(不離禪) 공부를 하였다. 항시 장보러 간다고 전주로 나가니 대중들이 중이 무슨 장보러 가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가 다녀와서는 어느 때는 장을 잘 보았다고 희색이 만면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장에 가서 실패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장에 갔을 때 온갖 색상(色相)에 내 마음이 끌리는가, 안 끌리는가 시험하러 간 것이니, 이것이 곧 실질적인 동정간의 공부이다"

(황이천, 〈내가 내사한 불법연구회〉)

진묵은 갓 쓴 불상을 조성하여 불당에 봉안하였다. 이를 방증하는 그의 유명한 '진승(眞僧)은 하산(下山)하고 가승(假僧)은 입산(入山)한다'는 말은 아직도 세인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 봉서사 진묵전. 완주 서방산 봉서사는 진묵대가가 출가하고 열반한 절이다.


진묵은 오는 세상은 거진출진(居塵出塵)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완주 서방산 봉서사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진묵대사가 이 절에 출가하고 열반하였던 데서 기인한다. 평소 소태산은 진묵에 대해 곧잘 이야기하였다.

그는 한갓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고 진묵의 행적을 좇아 새 회상 창립의 인연을 찾았고 교법을 초안하였고 때로는 소창하러 다녔다. 변산 월명암은 진묵이 중창한 절이요, 만덕산 미륵사, 정수사에도 진묵이 머물렀던 곳이요, 서방산 봉서사는 출가하고 열반한 절이다.

11세 소녀 이경순은 봉래정사 수호주 이춘풍의 7녀다. 이경순이 들었던 이야기. 원기10년 단오날 다시 봉래정사를 찾은 소태산은 실상사 중이 봉서사 진묵대사 부도를 보고 온 이야기를 듣는다. 부도가 희어지면 진묵이 다시 세상에 온다는 이야기에 소태산은 스님에게 되묻는다.

"그러면 스님이 진묵이 출세하신 것을 보면 알겠소?"
"아, 보면 알테지요."
"그러면 내가 진묵이라면 어쩌겠소?"
"아이고 뭐 그럴랍디여." (이경순 구술자료)

원기15년(1930) 음력 이월 초엿새날, 익산 본관에서 동선 해제식을 마치고 소태산이 말하였다.
"내가 들은즉 완주 봉서사 진묵대사의 부도 한 면이 점차 희어진다 하니 내 한번 가보리라"

이튿날 20여명의 제자들은 선생주 모시고 이리역을 출발하여 삼례역에 내려서부터는 봉서사를 향하여 30리 길을 걸어갔다. (조송광, 《조옥정백년사》 불시창15년항)

소태산은 가끔 제자들에게 이 말을 하였다.
"너희들이 나를 알 것냐?"

그 누구도 소태산의 경륜과 포부를 알지 못하였으며 더불어 벗하고 짝하지 못하였다.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른다."

▲ 박용덕 교무/군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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