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하루살이는 하루만 보고 버마재비는 한 달만 보므로 하루살이는 한 달을 모르고 버마재비는 일 년을 모르며, 범부는 일생만 보므로 영생을 모르나, 불보살들은 능히 영생을 보시므로 가장 긴 계획을 세우시고 가장 근본 되는 일에 힘쓰시나니라."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44장 말씀입니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를 신앙하는 나는 하루살이도 아니요, 한 달 살이 버마재비도 아니요, 이 버마재비가 무언고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사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달 살이 사마귀도 아니요, 일생 살이 범부의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아니요, 영생을 알고 영생을 말하고 영생 살이를 하고자 하건마는, 그저 하루살이의 삶을 살고 있는 저 자신을 바라보다가 심기일전 영생 살이를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도님들 살림살이는 어떠신가요?

설마 저와 같이 하루살이 인생을 사시는 분은 없을 것이고 일생 살이 아니면 벌써 영생 살이 살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영생 살이를 살아가고자 하는 저에게 또 우리 교도님들에게 대산종사께서 내려주신 법문이 있습니다. 원기52년에 대각개교절을 맞이하여 해주신 법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잠시 동안 관련되는 몇몇 인연으로 몇 가지의 일만을 치뤄 가는 것으로써 삶의 전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요, 실은 시방세계에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 수많은 인연들과 어울리어 한없는 세상을 거래하면서 서로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는 중에 일체 모든 일을 지어 나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철칙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은 영생의 거래를 탄탄대로로 활보하는 것이니 우리는 시방세계에 빈틈없이 얽혀져있고 또 장차 맺어질 모든 인연들과 길이 상생(相生) 상극(相克)의 업연(業緣)을 초월하여 좋은 인연들로 모든 일을 원만하게 대응하는 인생으로써 영생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세 가지의 도를 밝혀주셨습니다. 영생 살이를 하는 우리들은

첫째, 심사(深思)니, 곧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선악간 모든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 생각이 선하면 그 행동 또한 선해져서 한없는 복덕이 쌓이고, 그 한 생각이 악하면 그 행동 또한 악해져서 한없는 죄벌이 쌓이는 것이며, 또한 그 한 생각이 밝으면 그 행동 또한 밝아져서 영생을 향한 밝은 등불이 꺼지지 않을 것이요, 그 한 생각이 밝지 못하면 영생의 전정이 암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나타내기에 앞서 반드시 그 생각을 깊고 넓고 밝게 함으로써 먼 뒷날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영생의 대업에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생각이 단촉(短促)하고 옅으면 하는 행동 또한 옅어서 원대(遠大)한 일에 그르침을 면하지 못할 것인바 우리는 항상 심사로써 원려(遠慮)를 불러 일으켜 만반의 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여유(餘裕)니, 곧 넉넉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 가운데 나서 일 가운데 살다가 일 가운데 죽고 다시 일 가운데 나는 것이므로 한때의 목전(目前)의 일만을 치뤘다고 해서 그 밖의 다른 것까지도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니 매사에 각박한 처사를 말고 여유를 두어서 항상 마음을 준비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이 남아돌아야 불시에 밀려오는 재앙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고 만일의 경우를 미리 대비해 가는 여진(餘進)이 있게 되는 바 우리도 대인(對人) 접물(接物)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항상 넉넉하게 처사함으로써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쓸 수 있는 여유를 가지자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나 버마재비의 삶을 살 것인가
영생의 불보살 삶을 살 것인가


제가 얼마 전에 제방의 책상배치를 바꾸었습니다. 제가 방을 재배치 해볼까 한다고 했더니 식당에 모두들 그 쪼그만 방에서 뭐 옮길게 있냐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옮기는데 책장 사이를 받쳐주는 선반을 하나 끼우면 책장이 더 잘 활용이 될 것 같아서 다른 곳에서 받침을 구해오니 크기가 좀 큽니다. 그래서 자로 재서 톱질을 잘한다는 학생에게 부탁을 해서 끼워 넣었더니 약간의 차이로 중간의 나사못에 걸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판자를 쓰지 못하고 다른 판자를 다시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여유 있게 쟀더라면 다시 잘라도 될 것인데, 칼같이 잰다고 재서 약간의 실수가 있으니 결국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도 이와 마찬가지 일겁니다. 특히 우리는 무심코 단정 짓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대산종사께서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몇 동지와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안에서 불이 났다고 야단났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유를 갖자고 하여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몇 분 후에 기차가 정지하여 알아보니 몇 칸 앞에서 불이 났는데 다른 칸에서 야단을 하여 다치고 죽고 하였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유를 갖고 극락을 수용했다. 여유를 찾으려면 심고. 기도. 염불. 좌선을 하여야 한다."

여유를 찾지 못하여 죽음을 부르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곤 합니다. 사실 마음속에 여유가 있어야 깊이 있는 사고도 됩니다.

이 여유 넉넉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름 아닌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대한 확호한 믿음이 바로 여유와 넉넉함의 근원입니다.

나의 삶이 하루로 끝나지 않고, 저 사람과의 관계가 한 달로 끝나지 않고 바로 영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넉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음덕(陰德)이니, 곧 숨은덕을 쌓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자력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서 반드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아울러야만 원만한 삶을 누릴 뿐 아니라 오히려 타력의 유무(有無)와 다과(多寡)에 따라서 성패가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니 이 타력이 바로 음조(陰助)요, 이 음조를 불러오는 길이 곧 음덕(陰德)인 것이며, 또는 남을 음해(陰害)하면 내 앞길도 음해로써 막히게 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철칙인 바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철저히 믿고 깨달아서 정신 육신 물질 간에 직접 간접으로 늘 음덕을 베풀어 자타간 길이 복조를 불러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대산종사의 영생살이 세 가지 도를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 심사(深思), 여유(餘裕), 음덕(陰德)의 세 가지 도(道)만 갖추어 행한다면 영생을 살아가는 데나 대소의 모든 일을 추진하는 데에 큰 역풍(逆風)은 없을 것입니다.

심사(深思) - 깊이 생각하고, 여유(餘裕) - 넉넉하게 하고, 음덕(陰德) - 숨은덕을 쌓는 이 세 가지 도(道)만 갖추어 행한다면 무루의 복과 혜를 장만하는 나날이 되어 영생 살이에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전충남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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