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 만 번, 억만 번, 무량 번

▲ 천성준 교무/황등교당
나는 홍천교당에서 일반법회에 나가며 청년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일반법회에 참석해 좋은 법문을 듣고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마음에 안정을 얻었고 고향에 온 포근함과 아늑함을 느꼈다. 당시 홍천교당 교무였던 송타원 백수정 교무님은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내가 법열에 차 교당에 다니던 어느 날 백 교무님은 "대산종사를 한 번 찾아뵀으면 좋겠다"고 권했다. 나는 백 교무님의 뜻을 따라 한 달에 한 번밖에 쉬지 않는 직장에서 어렵게 휴가를 얻어 원평교당에 계신 대산종사를 찾아뵙게 됐다.

당시 대산종사는 원평 구릿골에 자주 산책을 다니셨다. 나도 대중과 함께 대산종사를 따라 구릿골에서 요가도 하고 법문도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산종사와 사진도 찍고 산책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것이 내가 꿈에 그리던 낙원생활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원평에서 돌아온 후 나는 교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더욱 열심히 했다. 신심과 공부심도 나날이 살아나면서 어느새 대산종사는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원평 구릿골에서 대산종사를 배알했던 때를 떠올리면 다시 힘이 솟았다.

대산종사를 뵌 후 나는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마음속으로 고민을 하다가 용기를 내 큰 형님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형님은 "재가 출가가 둘이 아니다. 우리 집은 아들이 넷이니 둘은 출가하고 둘은 재가로 살면 된다"고 하면서 나의 출가를 반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출가에 대한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다. 몇 차례 설득 끝에 형님도 나의 출가를 허락했다. 나는 바로 서울교당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했다. 출가서원을 하고 삼동원에 계시는 대산종사를 찾아뵈니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대산종사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데 삼세의 모든 업장이 녹아내리는 듯해 기쁨과 희열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출가생활을 정성 다해 하리라 다짐했다.

원불교학과에 들어와서 나는 방학만 되면 자주 대산종사를 찾아뵀다. 하루는 시자와 함께 삼동원 계곡에서 우거진 나무 잔가지를 자르고 오솔길을 내고 하면서 대중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때 대산종사는 우리에게 "없던 길도 천명이 지나가면 길이 만들어진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 법문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삼동원에서 오솔길을 내며 해주신 대산종사의 법문은 나에게 영생의 보감이 됐다.

나는 목소리가 좋지 않고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한다. 대산종사께서 '천명이 지나가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법문을 새기며 발성연습과 노래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며 나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후 유성교당에서 어머니 종재식에 '어머니'라는 노래공양을 올리며 스스로 마음이 뭉클했다. 하고 또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도 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대산종사를 찾아뵙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았다. 종법실에 가면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대산종사를 모시고 산책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이 나에겐 무한한 즐거움이었다. 그때 대산종사께서 해주신 "천 번, 만 번, 억만 번, 무량 번 멈추고 생각하고 취사하라"는 법문은 나의 공부표준이 됐다.

대산종사의 색신은 가셨지만 법신은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대산종사는 천인 만인 모두를 사랑하시고 자비로 대해주시며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오늘도 대자대비의 대산종사를 그리며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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