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으로부터 소외, 국가폭력보다 무섭다

▲ 고전평론가 고미숙 박사.
광주트라우마센터(센터장 강용주)가 시민과 함께하는 치유공동체 조성을 위해 치유의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4일 오후 7시 5·18기념문화센터 대동홀에서 열린 이번 강좌에는 고전평론가 고미숙 박사가 '몸과 우주, 그리고 내면의 치유'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삶과 인문학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그는 〈동의보감〉을 통해 몸과 우주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를 조망하며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돈· 결혼 위해 스펙 쌓고 성형?

그동안 나는 내가 학교에 다닐 때보다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이 훨씬 자유로워진 줄 알았다. 지금 10대들은 매우 자유분방하게 청춘기를 보내고 지적인 열정으로 공부하며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 많은 학생이 더 많은 시간을 감옥 같은 학교에서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에 당황스러웠다.

요즘 청춘들은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지성과 거리가 먼 공부를 필사적으로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40대가 된다. 〈동의보감〉에 보면 결혼 적령기는 남성은 16세, 여성은 14세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 적령기가 30~40대로 대폭 늘어났다. 청춘들이 긴 시간 동안 감옥 같은 학교에서 그 어마어마한 스펙을 쌓는데 모든 청춘의 열정을 다 써야 된다는 것이 너무 황당했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가? 돈 혹은 성공한 결혼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스펙을 많이 쌓는 것은 아닐까?

정말 놀라운 것은 여성들의 성형이다. 여성들은 여성해방을 위해 그토록 노력해서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스스로를 엄청나게 훼손하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고 있다. 수동적이 아니고 돈을 알뜰하게 모아서 양악수술, 키를 늘리는 수술 등 너무 위험한 일, 정말 목숨을 거는 일을 기꺼이 한다는 것이다. 성형에 대한 많은 부작용이 고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성형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런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대학시절에 배웠던 인간과 삶에 대한 기준을 다 무너뜨렸다.

'왜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하는가'에 대한 답이 그동안 '부자 되세요'였다. 그런데 이젠 부자 되기도 어렵고 부자 될 필요가 없다. 요즘 어디에 가나 공공시설이 잘 돼 있다. 공공자산을 잘 활용할 수 있으면 집이 그렇게 클 필요가 없다. 내가 많은 재산을 가질 필요도 없게 된다. 이 좋은 역사적인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청춘기에는 감옥생활을 하고 30대가 돼서 결혼하겠다고 노력해서 자기 계발하고 성형하고 하면 30대 후반 불혹의 나이에 간신히 결혼하게 된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여성은 이 시기에서 10년이 지나면 폐경기에 이르고 남성도 정력이 쇠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때 결혼하면 결혼생활이 원만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욕망인 '집(좋은 집), 땅(넓은 땅) 차(좋은 차)'로 무엇을 해결할 수 있을까? 결혼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 몸과 몸이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매뉴얼로 맺어주면 잘 살 수 있을까? 이것은 화폐가 다 감당할 수 없다. 사회제도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회는 나의 욕망과 생리는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남들이 부러워해 주는 걸로 세팅이 됐다. 여성도 자기 몸에 대한 자존감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기준이 완벽하게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자기 개성을 살리는 성형은 없다. 개성이 있으려면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된다. 성형을 자신감 때문에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몸과 우주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유(有)형의 것과 보이지 않는 무(無)형의 생명력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물질화되지 않으면 믿지도 않고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도록 100년 동안 연습했다. 그래서 무형의 가치와 에너지를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무형의 리듬과 에너지를 어떻게 써야 하는 가를 한 번도 훈련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사회에서도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질화된 가치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몸에 대한 극단적 소외가 일어난다. 자기 몸으로부터의 소외. 이것은 어떤 국가폭력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았지만 이미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고 허깨비가 되기 때문이다. 억압받고 탄압받을 때는 저항하고 분노하기 때문에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내가 나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 부처님이 다 모여도 구할 수 없다. 유형적인 것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쾌락밖에는 없다.

이 우주는 질량이나 에너지 변동이 없다. 누가 태어나면 누군가 죽는다. 지구의 인구가 70억 정도 될 것이다. 인구가 많이 늘어난 만큼 많은 야생동물이 멸종됐을 것이다. 그리고 식물들도 멸종했을 것이다. 이 이치를 생각하면 여기에서 인생의 법칙이 나온다.

〈동의보감〉에서는 우주의 기운은 태과불급(太過不及)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이 우주는 항상 무엇인가 많거나 모자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카오스이다. 울퉁불퉁하다. 카오스이기 때문에 기준이나 척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 울퉁불퉁하게 사는 것이 생명력이다. 울퉁불퉁해야 거기서 힘과 열이 발생한다. 그래서 개성이 중요하다. 다양하지 않으면 에너지가 흘러가지 않는다. 균질화되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권태감을 느끼게 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려면 울퉁불퉁해야 한다. 이것이 다양성이라는 가치이다. 그래서 절대로 모든 사람이 김태희처럼 예뻐지고 현빈처럼 잘 생길 수가 없다. 성형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자존감과 윤리적 자각

오늘날 부는 많이 늘어났지만, 인간의 자존감은 날이 갈수록 뚝뚝 떨어진다. 자존감은 자기가 윤리의 주체가 되기 전에 절대 안 생긴다. 이게 원리다. 내가 자신을 치유하고 해방되려면 내가 이 세계를 온전히 대면하는 윤리적 자각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외부에 있다. 원인도 결과도 외부에 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되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사는 것이 된다. 왜 이런 허깨비 노릇을 하는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때 윤리와 지성은 바로 최고의 수준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그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내 인생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이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문화는 물질을 향해 달려가고 물질을 더 분배받겠다고 싸우고 있는 형국이다.

부와 권력은 절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유형의 부가 있다면 이것으로 내가 행복해 지려면 부의 두 배쯤의 마음의 크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움직일 수 있다. 부가 어떻게 세상에 순화되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없이는 부귀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증여적 존재

물질에 관해서는 사람은 원초적으로 증여의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면 증여적 주체라는 것을 자각해서 나는 내가 이룬 물질적 재화를 어떻게 나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발휘할까 이것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증여적 주체가 된다. 사람들은 '내가 돈이 없는데 어떻게 베푸는가'하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남에게 베풀 수 없는 만큼 가난한 사람이 없고 남에게 받을 것이 없을 만큼 부자도 없다. 내가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증여라고 하는 인간과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회복하겠다.' 이것이 윤리적 선언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시스템이 오든 내 힘으로 증여를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다. 재벌이 된 다음에 기부하는 것은 세금을 덜 내려고 하는 것이지 증여가 아니다.

이런 것을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데 학교에서는 반대로 배운다. '절대 손해를 보지 말라', '친구와 경쟁에서 이겨야 해', '돈으로 무찔러야 해'라고 배우고 있다. 그러면 내가 증여적 존재인 것을 망각하게 된다.

자본과 화폐에 내 몸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한편으로 제도와 서비스 제도적인 것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오로지 물질로 환원되는 것밖에 없다. 이 우주의 법칙을 알면 생리를 어떻게 순화시켜야 하는 것을 알고, 생리가 곧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이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치유할 것도 없다.

성 충동 윤리적 훈련 필요

인간의 가장 위대한 것이 성적인 충동이다. 이것이 가장 제어가 되지 않는다. 특히 남성들이 문제다. 여성은 성적 충동이라기보다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자하는 열망이다.

남성들은 양이기 때문에 늘 제어가 안 된다. 그런데 이 성적 충동을 사회제도로 엄청나게 눌러놨다. 청춘들에게 그냥 성공을 향해 달려가라고 했지 성적인 문제는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 때문에 성 문제는 지하로 숨어들어 갔다. 변태적 성욕을 계속 키웠다.

성범죄가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전자팔찌 채워도 소용이 없다. 숨기고 피하고 억압하는 성교육이나 제도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자기가 스스로 윤리적 자각을 하는 수 밖에는 없다. 이것도 윤리적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은 정말로 자기 몸의 탐구자,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동의보감〉을 통해서 알게 된 작은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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