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 我 奉 公 2

공자가 절대 네 가지가 없었다는 말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 일을 하기 앞서서 그 동기에 사사로운 뜻이 없다는 말이요(毋私), 둘째,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기필이 없었다는 말이나 또는 고집이 없었다는 말은 천리에 맡겨 나갈 따름이지 어떤 자신의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자신에게 이로울 정도를 헤아리거나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디 사사로운 뜻이 없었기 때문에 도모하는 과정에서 기필도 없었고, 나아가 자기 고집도 없었고, 오직 자신이 바라던 이익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기로 성인의 행동은 처리 그 자체에 입각한 것이었지 그 어떤 사사로운 의도나 이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이 범부중생과 성인이 서로 다른 점이라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개 경우에는 공을 빙자하여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소위 빙공영사를 다반사로 아는 것이 범부중생의 어리석은 실태인데 이런 일들은 큰 것을 저버리고 작은 것만을 위해 전심전력하는 이른바 소탐대실의 결과를 초래하는 어리석은 일이라 말할 수 있다.

빙공영사를 하기 이전에 막상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밀쳐 두는 선공후사의 길을 걷도록 행하여 이 선공후사가 자신의 체질로 굳어지면 점점 그로부터 무아봉공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공사구분을 확실히 하느냐 아니면 빙공영사의 길로 잘못 드느냐 하는 것은 무아봉공의 길을 택해 나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두 갈림 길에서 자칫 잘못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외부적인 선택의 여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내부적인 선택의 여하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분명코 무아봉공으로 나가는 길은 버젓이 옳은 길일 뿐만 아니라 떳떳한 길인데도 이 길을 놓아두고 빙공영사로 가는 것은 분명 거기에는 먼 장래를 도외시하고 가까운 앞에 생각하는 본능적인 충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잠깐의 먼 앞을 정확히 살피지 못하고 단지 코앞만 보는 것은 버젓이 생각을 잘 굴리다 보면 스스로의 마음을 속인 결과일 뿐이다. 그런 결과를 내놓는 까닭은 스스로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이기심의 발로가 그 주된 원인일 수 있다.

사실 선공후사로 길이 잘 들면 그 때에는 자연히 무아봉공이 되는 것인데 우선 선공후사로 나아가는 길이 잘 들지 못한 관계로 빙공영사로 빠지는 것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식으로 제 몸에 익숙한 본능이 이끌려 움직이기 때문이다.

무아봉공의 참 뜻은 되도록 나를 버리고 여럿이 섬기는 공동선을 위해 매진하는 뜻이다. 즉 소아를 버리고 보다 큰 대아를 위해 힘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다 유한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불태우되 보다 바람직한 공동선에 나를 보태라는 말이다.

'받든다'는 말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손써 받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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