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적공으로 살라"

▲ 김성도 교도/남중교당
며칠전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 대산종사께서 딸 효인이를 안고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효인이를 안고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대산종사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26년전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당시 우리 가족은 부모님을 모시고 전라남도 완도에 여름휴가를 갔었다. 결혼 후 아내와 여름휴가때는 부모님을 꼭 모시고 가자고 약속했기에 이번에도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함께 간 것이다.

완도에 도착해 가족이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대산종사도 완도에 주재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대산종사는 완도에 계시면서 오후 시간을 이용해 교도들을 접견하면서 법잔치를 펼치곤 했다.

우리 가족도 자연스럽게 참석해 교도들의 공부담도 듣고 대산종사 법설도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나도 그동안 우리 부부가 과천교당으로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마음공부를 한 이야기를 대산종사에게 말씀드렸다.

그때 대산종사께 "아내가 딸 효인이를 임신했을 때 100일 기도를 열심히 해서인지는 몰라도 효인이는 태어날 때부터 피부가 고왔고 일요법회때도 우리 부부가 법회를 편안히 볼 수 있도록 옆에서 보채지 않고 잠을 잘잤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난다.

대산종사는 100일이 갓 지난 효인이를 안아주시며 "효인이는 기도를 많이 하고 태어난 아이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 모습을 고스란이 사진에 담았었다.

내가 대산종사님을 가까이에서 처음 뵌 것은 대학 시절 신촌교당 청년회에 다닐 때였다. 그 당시 서울교구에서 청년회가 있는 교당이 몇 개 없을 때였는데, 마침 신촌교당에서 교당을 크게 신축하여 봉불식을 성대히 열었었다. 대산종사는 봉불식 설법을 하셨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설법에 매료돼 그때부터 항상 내 마음 속에 큰 스승으로 모시고 살게 됐다. 청년회원들까지도 일일이 챙겨주시던 자비로운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원평교당에서 정양하고 계실 때도 우리 부부는 기회가 생겨 대산종사를 찾아뵀다. 그때 대산종사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 부부에게 "앞으로의 삶을 기도 적공을 열심히 하며 살라'고 당부하시며 기념촬영도 해 주셨다. 그 인연으로 아들 현준와 딸 효인이가 전무출신 서원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내도 전주여고 졸업 후 전무출신의 서원을 가졌는데 집안 사정으로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그 아쉬움의 보상 차원은 아니지만, 자식들이 전무출신 서원을 세운 것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녀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정하더라도 본인이 평생을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올해 여름 우리 가족은 나의 회갑기념으로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앞으로 일원가족으로 더 열심히 살며 각자의 영성을 밝힘은 물론이고, 힘 미치는 대로 열심히 세상을 맑히고 밝히는 마음공부를 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 가족이 행복한 일원가족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대산종사의 크나큰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종사와 같은 큰 스승의 따뜻한 법문 말씀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산종사 탄생 10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성자의 따뜻한 품이 더없이 그리워진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잔잔한 염화미소를 짓고 있는 대산종사를 바라보며 다시금 자신성업봉찬을 다짐해 본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