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를 아는 사람은 복을 짓는다. 내생에 받을 것을 믿거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공부한 사람은 복을 짓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을 몰래 짓거나 시치미를 뗀다. 상(相)없이 보시를 하면 복이 몇 배나 더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그러나 복 짓고서 표현을 하든지 않든지 모두 상의 범주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상은 착(着)의 씨앗이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한계를 짓는다.

존재의 자각에서 '나'라는 것이 있어지나, 자칫 영혼의 가치를 잊고 육신에 의한 인간의 삶에 초점을 두다보면 '나'에서 상이 생기고, 그 상은 욕심과 관념과 습관으로 구체화된다. 이렇게 형성된 마음의 결정체가 착인데, 착은 자신의 영혼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둔다.

한 존재가 진리에 의한 자각으로 깨어있으면 인생을 착이 아닌 의미의 삶으로 엮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육도는 그 영혼에 있어서 여행과 체험의 의미로 남기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일 뿐이게 된다.

진리에 의한 의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불보살이라고 부른다. 불보살은 복을 지을 때에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거나 내생에 복 받으려는 것처럼 상이나 욕심으로도 하지 않는다. 복을 지을 수 있는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척도에서 접근한다.

한 영혼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데에 있어지는 덕목을 두 가지로 살펴본다면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이다. 사람의 척도에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맑음과 풍요로움이라 할 수 있다.

수행자에게서 맑은 구석이 없다면 별난 재주가 있어도 수행자의 자격은 없다. 배려를 전제한 지혜와 의지가 약해도 마찬가지다.

불보살은 복을 지을 줄 아는 마음과 실행에 옮김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풍요로워짐을 알기에 누구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몰라준다고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무상(無相)이라 할 것도 없는 무상의 모습이다. 과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중생은 누가 나를 때리면 반사적으로 되갚고, 고급 중생은 '전생에 내가 그랬나' 하고 참고 감수한다. 하지만 불보살은 차원이 다르다. 맞아서 아픈 것을 알고는 '나는 때리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여기에는 공부가 들어있다. 그래서 참을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게 된다.

불보살도 인간의 삶으로는 선악의 인연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염려치 않음은, 알고서는 악연을 짓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에 의한 업의 정도라면 스스로 공부해 가는데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이 되어서다.

인과를 공부하되 불보살의 인과로 공부하는 속 깊은 수행자가 많으면 좋겠다. 인지가 밝아질수록 종교가 권위로 서지 못하고, 잘 지어진 교당이 교도를 모으지 못한다. 오직 교법과 수행자에 의해 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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