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공부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알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대종사께서는 한 가지 평가 척도를 제시해주셨다.
즉 대종사께서는 희로애락을 대하는 역량에 따라 중생과 보살과 부처로 구분하셨다.

그 내용을 보면 "중생은 희로애락에 끌려서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많이 보고, 보살은 희로애락에 초월하여 마음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해를 보지 아니하며, 부처는 희로애락을 노복(늙은 남자종)같이 부려 쓰므로 이로 인하여 자신이나 남이나 이익을 많이 본다"고 하셨다.

참 명쾌하지 않은가! 화낼 경계에 화를 내어 자신의 마음도 상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상하게 한다면 그는 중생이다. 그러나 화나는 경계를 당해서도 그에 끌려가지 않아 자신이나 남이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한다면 그는 보살이다. 그렇다면 부처이신 대종사의 취사는 어떠하셨을까?

대종사께서 하루는 한 제자를 크게 꾸짖으신 후 그 제자가 다시 오자 바로 자비하신 성안으로 대하셨다. 이를 본 다른 제자가 그 연유를 여쭈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아까는 그가 끄리고 있는 사심을 부수기 위하여 그러하였고, 이제는 그가 돌이킨 정심을 북돋기 위하여 이러하노라"고 하셨다. 〈대종경선외록〉 실시위덕장 8절에도 대종사는 "희로애락이 골라 맞으시나 희로애락을 쓰고 나시면 반드시 법이 되어서 대중에게 유익을 주신" 부처님으로 묘사되어 있다. 과거의 양반이 노복을 부린들 이처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을까.

티베트 사람들은 생일잔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생사 윤회하는 중생들이 자신의 생일을 아는 것보다 수행을 해서 죽을 날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을 진짜 재산이라고 믿기 때문에, 끝없이 경전을 외우고 끊임없이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허물은 그날그날 참회하고, 정성스런 공양물을 삼보 전에 올린다. 그런데 이러한 티베트 사람들이 가장 큰 욕으로 여기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바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란 곧 희로애락에 끌려 사는 중생이라는 말이니,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사는 그들에게 그보다 더 큰 욕도 없을 것 같다.

<원광디지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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