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地無痴自性慧

마음은 무엇이고 성(性)은 무엇이란 말인가? 본디 불교에서는 마음을 일체유심조라 하여 일체가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라 하여 마음을 가장 바탕으로 여긴다. 그리고 성이란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능을 성이라 일컬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교에서는 성을 근본이라 여겨 마음이 나오는 바탕 이라는 뜻에서 심(心小)에 낳는다는 뜻을 지닌 낳을'생(生)'을 붙여 '성(性)'이라 했다. 즉 불교에서의 인식의 근본은 '심(心)'이며, 유교에서의 행동의 근본은 '성(性)'이라 하여 인식 위주와 행동 위주가 서로 다르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심지(心地)'라 하면 일체유심조의 논리처럼 마음 바탕, 즉 성능이니 성질이니 하는 말을 떠나서 성능과 성질이 밖으로 들어나게 될 수밖에 없는 더욱 근본적인 것을 말함이다.

또 나아가 심지는 본래 어리석음이 없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디 "도는 알거나 알지 못함에 속하지 않는다(道不屬知不知)"는 말처럼 어설프게 알았다고 장담하는 알음알이 병을 '痴'(어리석을 치)라 하고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병에 묻혀 있는 상태를 어리석을'치(癡)'라 하여 안다는 병과 모른다고 하는 병, 둘이 다 실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 안다는 것이 섣불리 알고도 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왜 뻔히 알 수도 있는 것인데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까닭은 본질을 속에 든 본질을 쉽게 알아내지 못하고 겉만 보고 짐작해 알았다는 데에서 알았다고 호언장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알다' 는 말 자체가 암시해주고 있듯이 본질을 제대로 안다고 하는 것은 겉만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알속을 들어다 보아야 정작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속을 들어다 볼 수 있도록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잘못 주어진 선입견을 모두 다 깨끗이 청소해 버리는 이른바 마음의 대청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즉 일반적인 청소는 바닥을 닦는 것만으로 청소를 마쳤다 한다. 그러나 '대청소'란 바닥에 앞서서 천정까지의 먼지를 다 쓸어 내고 상하를 다 말끔히 하는 청소를 말한다. 이같이 말끔히 다 청소하는 것을 일러 빗자루를 거꾸로 손에 쥐고 천장의 먼지를 다 털어 낸다는 뜻으로 천정털이'혜(彗)'에 '심'을 붙여 마음을 몽땅 대청소하는 일을 말하여 '지혜'라 한다. 즉 마음의 광명을 가리는 무명을 완전히 청소해야 지혜의 광명이 솟는다는 말이다.

지혜가 솟아나면 마음이 고요하여 '정(定)'과 '혜(慧)가 안밖으로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만물을 제대로 고요히 관조할 수 있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만물이 만물일 수밖에 없는 '자성(自性)'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사철의 좋은 흥취를 얻어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정자는 말하기를 "만물을 고요히 관조하다 보면 스스로 그러한 이치를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 사람과 더불어 즐길 수 있다(萬物靜觀皆自得, 四時佳興與人同)"라고 했다. 정(靜)은 정(定)으로 통하고 관(觀)이라야 속의 알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