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길 교무의 '수심결'

卽佛性이 現在汝身이어늘 何假外求리요 汝若不信인댄 略擧古聖의 入道因緣하야 令汝除疑하리니 汝須諦信이어다 昔에 異見王이 問婆羅提尊者曰何者是佛이니꼬 尊者曰見性是佛이니이다 王曰師- 見性否이까 尊者曰我見佛性이니이다 王曰性在何處니이꼬 尊者曰性在作用이니이다 王曰是何作用이관대 我今不見이니꼬 尊者曰今現作用이언마는 王自不見이니이다 王曰於我에 有否이까 尊者曰王若作用인댄 無有不是어니와 王若不用인댄 體亦難見이니이다 王曰若當用時하야는 幾處出現이니이꼬 尊者曰若出現時에는 當有其八이니이다 王曰其八出現을 當爲我說하소서 尊者曰在胎曰身이요 處世曰人이요 在眼曰見이요 在耳曰聞이요 在鼻辨香이요 在舌談論이요 在手執捉이요 在足運奔하야 偏現하야는 俱該沙界하고 收攝하야는 在一微塵이니 識者는 知是佛性이요 不識者는 喚作精魂이니이다 王이 聞하고 心卽開悟하다 叉僧이 問歸宗和尙호대 何者是佛이니꼬 宗云- 我今向汝道하려하나 恐汝不信일까하노라 僧이 云和尙誠言을 焉敢不信이리이꼬 師云卽汝是니라 僧이 云如何保任이니꼬 師云一翳在眼에 空花亂墜니라하시니 其僧이 言下에 有省하니라.

곧 불성이 현재 네 몸에 있거늘 어찌 밖에서 구하리오. 네가 만일 믿지 아니할진대 옛 성현들의 입도한 인연을 대략 들어서 너로 하여금 의심을 제거하게 하리니 너는 마땅히 진실히 믿을지어다. 옛적에 이견 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어 가로되 "어떠한 것이 이 부처이오니까" 존자 가로되 "견성을 하면 이 부처이옵나이다" 왕이 가로되 "대사는 견성하셨나이까" 존자 가로되 "나는 불성을 보았나이다" 왕이 가로되 "성품이 어느 곳에 있나이까" 존자 가로되 "작용하는데 있나이다" 왕이 가로되 "이 무엇이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에 보지 못하나이까" 존자 가로되 "지금도 작용을 하건마는 왕이 스스로 보지 못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그러면 나에게도 있나이까" 존자 가로되 "왕이 만일 작용을 하시면 불성 아님이 없거니와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체(體)도 또한 보기가 어렵나이다" 왕이 가로되 "작용할 때에 당해서는 몇 군데로 출현하나이까." 존자 가로되 "만일 출현할 때에는 마땅히 여덟군데가 있나이다" 왕이 가로되 "그 여덟 군데로 나타나는 것을 마땅히 나를 위하여 설하소서" 존자 가로되 "태중에 있을 때에는 몸이요, 세상에 처할 때에는 사람이요, 눈에 있어서는 보는 것이요, 귀에 있어서는 듣는 것이요, 코에 있어서는 냄새 맡는 것이요, 혀에 있어서는 말하는 것이요, 손에 있어서는 잡는 것이요, 발에 있어서는 걸어 다니는 것으로서 펴 놓으면 항하의 모래 수효와 같은 세계에 가득 차고 거둬 들이면 한 미진 속에 들어가나니 아는 이는 이것을 불성이라 하고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 하나이다" 왕이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곧 열리었나니라. 또 어떠한 중이 귀종 화상에게 묻되 "무엇이 부처이오니까."

귀종이 이르시되 "네가 지금 믿지 아니할까 염려하노라" 중이 이르되 "화상의 진실하신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아니하오리까" 대사 이르시되 "곧 네가 부처니라" 중이 이르되 "어떻게 보림 공부를 하오리까" 대사 이르되 "한 티끌이 눈에 있으매 허공 꽃이 요란하게 떨어지나니라" 하시니, 그 중이 언하에 크게 깨달으니라.

5장은 내용이 길어 핵심적인 의미만 짚고 넘어가도록 한다. 이미 앞서 4장에서 불성이 누구나 몸 가운데 있는데 보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치 안경을 끼고서 스스로 그 안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불성을 보려면 안경을 벗어 보아야 안경의 존재를 안다. 여기서도 불성은 나의 감각을 사용하거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알아차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움직임이 없는 체는 인식영역 내에서는 감지할 수 없다. 체는 대령과 합한 것이며, 만물과 한몸이다. 움직임이 있어야 육식을 통해 감지할 수 있으며 개령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지 몸으로만 존재할 때는 몸을 알 수 없고, 몸짓으로 움직임이 드러나야 몸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불성은 몸에 고요히 존재하고 있지마는 몸의 감각기관을 통하여야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성을 깨친 후에 그것을 잘 거느리고 활용하려면 최초의 한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늘 유념하라고 일러주고 있다. 마음은 곧 욕망이라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나의 욕망을 항상 고요히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