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 地 無 非 自 性 戒 3

마음에 본디 전혀 그름이 없는 것을 자성의 계(戒)라 한다고 했다. 본디 선과 악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공부 길을 잡고자 하는 자는 우선 먼저 모진 벗을 멀리 떠나고 현선한 벗을 가까이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오계니 십계니 하는 등 계문을 받아 실행함에 있어서 열고 닫기를 잘 해야 한다(善知持犯開遮)"고 했다. 즉 범계를 지니되 열고 닫을 줄을 잘 알아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지(善知) 즉 '잘 알라'고 말한 것은 아주 묘미가 가득한 말이다.

말하자면 범계를 가지는 것은 누구나 바른 일이다. 그러나 범계를 지니되 열고 닫을 줄을 잘 알라는 말은 계문은 단지 지키는 것으로 능사를 여길 것이 아니라, 열고 닫을 줄을 그냥 아는데 있다는 말이 아니라 잘 알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렇다면 범계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기는 하되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에는 열고 닫을 줄을 잘 알아 열어야 할 경우에는 열고, 닫아 버려야 할 때는 과감하게 닫을 줄을 잘 알아서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열고 닫을 줄을 잘 아는 것은 식별할 줄 안다거나 분별할 줄 안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토록 열고 닫을 줄을 잘 아는 이를 일러 우리는 '선지식(善知識)'이라 말하니 문제는 마땅히 지키는 것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실은 꼭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되는가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해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작용이 실행으로 옮겨 질 때에는 반드시 깊히 생각하고 익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생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에 앞서서 과연 무엇이 우선이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말하면 남방 불교에서 산중 도적이 갑자기 뛰쳐나와 바랑을 빼앗아 버리고 스님 한 사람을 띠 풀로 꽁꽁 묵어 놓고 물건만 빼앗아 가버렸다고 치자. 그러나 그 묶인 스님은 묶은 띠 풀의 생명이 상할까 두려워 그만 고스란히 묶인 채 있다가 생명을 잃었다 하자.

이럴 경우에 과연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문은 적당한 말인가? 그렇지 않다. 스님이나 띠 풀이 다 같은 생명이나 그 중 어떤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말인가. 물어 볼 것도 없이 묶여진 띠 풀을 젖히고 과감히 일어난 뒤에 띠 풀을 살펴 돌보는 것이 천만 옳은 일이다.

만약 띠 풀이 죽는다 할지라도 불제자인 스님이 살아서 불은을 갚는 도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참으로 열고 닫을 줄을 잘 아는 이른바 선지식의 참다운 행동이다. 따라서 계문은 사람의 행동을 구차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스럽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계(戒)'라는 말도 '두 손으로 창을 잡고 지킨다는 말'인데 과연 무엇을 지킨다는 말인가? 우선 자신을 지킨다는 말이다. 그렇기로 '아(我)'라는 말도 손수 창으로 나 아닌 것으로 빠지려 드는 나를 부지런히 지켜낸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대승적 가르침의 요체인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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