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명상(言語名相)이 완연(宛然)하다'는 것은 말과 글과 이름과 형상이 뚜렷하다는 뜻이다. 그냥 뚜렷하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한 마음이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따라 대소유무(大小有無)의 구분과 선악업보(善惡業報)의 차이 하나하나가, 말과 글뿐만 아니라 이름 지어 구분하고 형상으로 표현해도 진리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음이다.

성품을 발현시켜서 대소유무로 통찰하고 선악의 인과를 궁굴려 진급해가는 사람은 주위를 은혜롭게 할 뿐만 아니라 언어명상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누구나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다. 진리의 흐름대로 살면 거룩하기는 하나 고루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 일반이다. 오히려 섬세한 아름다움과 조화의 여유로움이 있는데 말이다.

언어명상에 공적영지로 깨어있으면 맑고 평온하고, 대소유무가 내재하면 의식이 넓으며 조화롭다. 나아가 인과가 바탕이 되면 따뜻하고 포근하다. 이처럼 수행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모두가 언어명상이 선명하면 좋으련만, 대부분 아쉬운 것도 현실이니만큼 수행의 관점이라면 현 생활에서부터 가늠하고 풀어가면 좋을 듯싶다.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최소한 조건이라면 언어명상이 투박하고 거칠지언정 막돼먹지 않음이다. 어떤 순간에도 막말 막 행동만 하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자기 자신을 다스려가는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운전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갑자기 끼어들어 급정거나 핸들을 틀어 모면할 정도에서 막말하지 않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막된 언행을 하지 않을 정도라면 자신을 다스려서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다. 자기 통제에 힘이 있다면, 그 다음은 순리에 의한 성품 발현의 경로로 심성을 길들여야 한다. 통제의 공부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욕심과 관념 그리고 잘못된 습관을 고쳐감으로써 마음의 힘과 응용력을 키울 수 있지만, 공적영지 즉 성품으로 깨어난 수행이라야 싱그러운 생명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품을 바탕 삼는 사람의 특성은 순수하기도 하지만 혹 잘못되었거나 본의와는 다르게 상대가 불편함을 느낄 때면, 수정해가는 모습에서 저항이나 흔적이 없다. 판단에 있어서도 깊고 넓으며 조화롭다. 대소유무의 진리를 판단의 근간으로 삼는데, 생각을 궁굴림을 넘어서 동물적 감각의 판단이 될 정도다. 이런 사람은 혹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창피를 당하고 손해 볼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대로 인정하고 진리와 대중의 평가를 받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 앞에 비굴한 자신을 더 견디지 못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의지 있고 정성스럽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하다.

언어명상 하나하나에 진리로 깨어있어서 선명하게 살아있다면 일원의 진리를 품에 안은 사람이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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