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어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

* 장명등 : 대문 밖이나 처마 끝에 단 유리등
'다리 위에서' -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시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 도쿄에서 조치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한 이용악은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고향과 만주를 떠도는 유랑민의 애환과 정서를 탁월한 언어미로 담아낸 시인이다.

이 시는 국수를 먹으러 가다가 다리 위에서 어린시절의 가난을 회상한 작품이다. 대를 이은 소금장수 남편이 객사하자, 시인의 모친은 떡이나 국수를 팔면서 5남매를 길렀다고 한다. 일년 중 오로지 아버지의 제삿날만 쉬던 그 눈물겨운 가난과 허리 휘는 노동, 그리고 유랑생활이 시인의 예리하지만 따뜻한 사실주의적인 안목을 길렀을 것이다. 그래서 악성 베토벤은 자기의 음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바치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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