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 知 識

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환경이라는 말을 경에서는 경계라 말한다. 즉 경계란 자기의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경계라 하거나 환경이라 하거나 간에 그 말의 뜻은 거의 흡사하다.

그렇다면 그 경계란 굳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반드시 내 몸 옆을 둘러쳐 있는 것이라 보다는 오히려 내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잔영도 뿌리 깊은 환경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크나 큰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마음속에 꿰뚫고 자리한 이른바 근심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마음에 뿌리박혀 쉽사리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꿰뚫을'곶(串)'에 마음'심(心)'을 붙여 근심'환(患)'이라 했다.

즉 근심이란 말은 곧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좀처럼 물러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근심(根心)'을 말하기 때문에 이 근심은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뚫기는 뚫되 계속해 뚫어 쌓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한편 근심은 곧 번뇌가 집착이 쌓여 이룩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무슨 집착이 쌓여 이룩된 것인가? 한 마디로 무명에 가려 진 집착이 계속해 쌓여 이룩된 것이며, 이 무명의 결과는 바로 원망에서 오는 수가 대부분이다. 이 원망 역시도 실은 내 중심의 아집에서 오며 그 결과는 고통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집에서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대승적인 견지에서 잘 살펴 보면 과연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이 고통이 어떤 원망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꼭 그렇지 만은 아닌 것인가를 곰곰이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원망하지도 말아야 할 만한 것을 굳이 붙잡고 놓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라 느끼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보자. 부모가 나를 낳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낳되 가급적이며 훌륭한 부모가 되어 나를 낳을 것이지 하필 가난하고 못난 형편에서 나를 낳았단 말인가? 라고 계속해 원망으로 마음을 붙들어 매어 놓는다면 그렇다면 틀림없이 나를 낳은 부모 자체가 원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왕에 나온 내가 내 이전에 있었던 부모를 원망할 조건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부모가 있었기에 좋든 싫든 내가 이 세상에 나와 한 세상을 살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부모는 만사만리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사만리의 근본인 부모를 두고 이렇거니 저렇거니 투덜대며 원망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다. 오히려 만사만리인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대로 공경해야 한다. 즉 원망을 감사로 돌려야 한다.

이처럼 잘 알아 돌리는 공부가 선지식(善知識)의 공부다. '지(知)'는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나가야 할 줄을 안다는 말이며 '식(識)'은 창 끝에 달린 알림판을 잘 알아야 한다 말이기 때문에 이를 잘 알라 부촉한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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