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밀행·인욕 여래

법통과 종통을 호위한 제자여래. 흔적 없는 보시를 베푼 밀행여래. 일생을 자력에 바탕 해 인욕정진한 인욕여래로 우리 곁을 다녀 간 상산 박장식(常山 朴將植,1911~2011) 종사.

그의 조부와 부친은 문과에 급제해서 여러 관직을 지냈다. 이런 유수한 집안에서 성장하며 경성제일보통학교와 경성법학전문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엘리트였다. 우리 회상과의 인연은 비를 피해 길가의 주막집에서 만난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가 남원의 유수한 집안을 우리 회상으로 인도 하려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어머니(정형섭)가 입교 하면서 비롯됐다.

원기 23년, 회갑을 맞은 어머니가 총부에 공양하고자 하는 원에 따라 불법연구회를 처음 찾았다. 대종사를 뵙고 인사를 올리자 "올 줄 알았다" 그 한 말씀에 말문이 막히고, 꿈에 보던 신선을 만난 듯 황홀했다.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대종사께서 "동선 중이니 선을 나고 가라"는 말씀에 열흘을 더 머물렀다.

선악귀천의 차별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모습에서 인생의 지표가 되는 도량임을 알았다. 모친 회갑기념으로 남원교당을 설립하고 원기 24년 대종사를 모시고 봉불식을 하고, 교도회장 직을 수행했다.

원기26년 대종사의 뜻을 받들어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처음 맡은 일이 〈회규〉에 관한 일과 〈정전〉편수의 허가와 학교를 설립하는 일 등이 주어졌다. 전라북도 학무국에 허가신청을 내면 황도 정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듭 반송됐다. 이때 순회강연 차 익산에 내려온 김태흡 스님과 대종사와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런 인연으로 〈불교정전〉을 발간할 수 있었다.

이후 총무부장과 공익부장 등으로 봉직하며 대종사의 열반과 정산종사의 추대 등 다사다난한 교단사와 함께하며 해방을 맞았다. 원기31년 수위단원에 피선되고, 대종사께서 직접 명명해준 '유일학림'의 초대 학림장에 임명됐다.

원기36년 일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 받아 원광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이 됐다. 이후 원기39년 원광고등학교를 개교하며 대종사께서 염념불망하던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기47년부터 교정원장직을 수행하며 개교반백년 사업 추진, 원광 중·고 교사신축 중 부도위기에 처한 일, 서울회관 건립 등 다단한 일들을 헤쳐 나갔다. 이런 중에도 복지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후 서울출장소 소장과 미주교령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대종사의 뜻을 받들고 정산·대산·좌산종사를 보필하며 교단사에 수많은 족적을 남겼다. 특히 좌산종사가 종법사에 당선되자 오체투지로 법가지를 해 대중의 사표가 됐다.

"둘이면 안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협력해야 합니다. 잘 될 것입니다"는 최후법문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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