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은 다른것과 연결
되돌아오는 인과

▲ 컵이 언제부터 버려지는 것이 되었는가.
▲ 청소수레에 담긴 낙엽. 도시는 낙엽조차 순환시키지 못하는 곳이다.
오랜만에 장소를 정하지 않고 거리 한복판에서 친구를 만났다. 낙엽 지는 가을을 느껴보자는 의미였다.
만나서 거리를 거닐다가 갈 곳을 정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우린 얼른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낭만도 젊어야 즐길 수 있는 거야' 하는 우스갯소릴 곁들이며, 주문한 커피를 가지러 갔다가 나는 일순간 당황했다.

주문한 커피는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채 쟁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나가서 마신다는 말을 따로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데다 주냐고 물었더니 일부러 머그잔에 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냥 다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늘 다니는 단골집에선 으레 머그잔을 준비해주었기에 잠시 방심했던 거다.

그때서야 한 사람을 빼곤 모두가 일회용 컵을 앞에 두고 있는 카페 안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언짢아졌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면 세상에 쓰레기를 남기는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그 불편한 진실 때문에.
▲ 비닐 주머니에 담긴 음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에도 쓰레기가 있었던가 생각해 봤다. 짚단과 황토와 수숫대, 거기에다 서까래와 기둥에 쓸 목재 몇 개, 주춧돌 삼을 돌 몇 덩이로 초가삼간 지었다. 그곳에서 한 두 세대가 살다 그 집을 떠나고 나면 집은 고스란히 무너져 내려 자연으로 돌아갔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무명이 그랬고, 삼베가 그랬다. 입다가 해지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먹는 건 또 어땠을까. 우리가 먹다 남긴 것들은 여물통 속에 들어가 같이 사는 짐승의 먹이가 됐다. 쌀뜨물이며 설거지물은 부엌 바깥에 있는 소채밭에 거름이 됐다.

모두가 다 돌고 돌아 남김없이 분해되고 순환됐다. 가을 산에 가면 낙엽이 떨어져 수북하다.

어느 날, 함께 간 아이가 이렇게 많이 낙엽이 쌓이면 몇 년 지나지 않아 금방 산이 낙엽에 파묻히지 않으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 눈에 비친 도시의 낙엽은 청소부 아저씨가 치워야하는 쓰레기일 뿐이었으니까.

순환되고 분해되어 사라지지 못할 때 그것을 일컬어 쓰레기라고 부른다.
물건을 사면 정작 필요한 물건보다 훨씬 많은 부피의 쓰레기로 바뀌는 포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친구에게 물었다.

물건이 근사하게 보여야 사람들이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느냐고, 그렇게 하려면 포장도 중요하다는 게 친구의 입장이었다. 덧붙여 어떻게 모든 것을 환경만 생각하며 살 수 있냐고도 했다.

친구말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어떻게 돈의 흐름을 무시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런데 친구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나자 나는 뭔가 답답한 생각이 또 들었다.

'그래서? 환경만 생각하고 살지 않고 환경도 생각하며 소비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이거야 말로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서 파는 당근, 호박 하나부터 방울토마토, 심지어 고깃덩이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비닐 포장 혹은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 팩에서 자유로운 게 드물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다는 것은 곧 쓰레기를 만든다는 것이 내포된 셈이다.
거기에 음식물쓰레기까지 생기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발자국마다 쓰레기를 남기는 꼴이 되고 마는 거다.

하와이 인근에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섬이 두 개 있다. 그 섬의 크기는 텍사스 주 두 배, 한반도의 일곱 배쯤 되는데, 원래부터 있던 자연스런 섬이 아니라 해양에 버린 쓰레기들이 모여서 생긴 섬이다.

태평양을 흐르는 해류의 특성상 바다를 떠도는 쓰레기들이 한 곳으로 모이게 된다고 한다. 그 쓰레기 섬의 90퍼센트 이상이 플라스틱과 비닐로 이루어져 있다.

UNEP(유엔환경계획,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에 따르면 지구 전체 바다 1㎡ 당 1만3천여 개의 플라스틱 조각이 떠다닌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보니 바다 속 플랑크톤과 플라스틱, 비닐 등의 쓰레기가 햇빛, 염분 등에 반응하며 서로 섞여 죽 같은 상태가 된다.

이걸 먹은 해양 동물들은 포만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더 이상 먹이를 먹지 않아 아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갈라보면 위 안에 플라스틱 조각들이 가득하다. 어떤 거북이는 폐비닐에 기도가 막히거나 버려진 플라스틱 끈이 허리를 졸려 결국 죽고 만다.

해양생태계는 단지 해양생태계만의 문제로 치부되고 마는 걸까? 해양생태계는 그대로 육상생태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극의 기온이 올라가 빙하가 녹게 되자 아델리 펭귄의 먹이인 크릴새우의 양이 줄어들게 됐다.
크릴새우의 먹이인 조류(algae, 藻類)는 빙하의 아랫부분에 산다.

그런데 빙하가 줄어드니 조류의 양도 줄어들었을 테고 그러자 크릴새우가 또 크릴새우를 먹는 아델리 펭귄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아델리 펭귄의 알을 먹고 사는 도둑갈매기도 그 영향을 받게 됐다.

도둑갈매기 똥은 남극 육지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모든 것이 다 영향을 받게 된 거다.
정말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가 직접 우리 손으로 아델리 펭귄을 죽이지 않았고, 바다거북을 죽이지 않았으니 살생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되묻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버린 플라스틱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산다는 건 문제다.

바다든 산하든 버려진 쓰레기는 바로 우리의 이기심의 다른 모습이고 무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지구라는 닫힌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인위적으로 벌려놓은 것들이 고스란히 소멸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절대 불가하다. 결국 우리에게 모두 다 되돌아오는 이 인과를 빨리 알아차릴수록 그로 인해 생기는 괴로움은 그만큼 줄어들 거라 생각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한번 오르게 되면 대단한 결정심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전차에서 뛰어내릴 수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그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야하지 않을까.

국화향기 가득한 가을이다. 청명한 가을, 높아질 하늘만큼이나 나와 연결된 타자를 살피는 여유가 마음 안에 자리하길 바란다.

내 이기심이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혜를 키워 번뇌의 흐름을 끊고, 우리가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소장 최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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