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산 이수오 원정사

한남동 서울수도원을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도와 교단에 귀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염산 원정사.

경산종법사는 "원정사는 영광교구장 등 교화현장에 봉직하면서 지역교화를 위해 유치원과 신용협동조합을 신설하였고, 연원교당을 설립해 교화의 저변을 확대했다"며 "또한 이리자선원, 수양의집 원장을 역임하면서 그 발전에 최선을 다했고, 한국전쟁의 고아들을 위한 보금자리인 서울보화원을 설립하는 데 혈심혈성을 다한 공도의 주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심인을 문득 깨달아 얻어/ 닦고 닦아 억 만 번 고요하고/ 일마다 지극한 공심 나투니/ 생사는 장중의 한 구슬이로다'라는 법구로 석별의 정을 나눴다.

출가를 대표해 고사에서 이순원 공익복지부장은 "원정사는 수계농원에 근무하실 때 현판을 '반농반선 활불도량'이라고 써 놓았는데 대산종사께서 보시고 반농반선이면 되겠느냐, 전농전선으로 하라는 말씀을 받들고, 곧바로 '전농전선 활불도량'으로 고친 일화는 교단과 스승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를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이어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 마다 언제나 사람들이 몰라 준다 섭섭해 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진실하게 하라"며 "원정사는 숨은 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사는 마음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고 추모했다.

원기32년 성산 성정철 종사의 추천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한 염산 원정사는 원기36년 서울보화원 임원을 시작으로 총무, 원장, 이사로 재직했다.

원기54년 동산선원 교무, 용신·서귀포교당 교무, 영광교구장 겸 교당 교감, 이리자선원 원장, 수계농원 원장, 영산사무소 소장, 원광효도마을 수양의집 원장으로 봉직했다.

원기67년 정식법강항마위에 승급한 염산 원정사는 원기91년 대봉도, 원기97년 종사 법훈을 받았다.

원정사는 원기80년 퇴임한 이후에도 수계농원 상임고문으로 6년간 더 봉직하는 등 일속에서도 성리단련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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