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톰 크레민스 교도 / 워싱턴교당
내가 오늘 함께하고자 하는 주제는 '순간(찰나)에서의 자성의 회복력'이다. 그 첫 번째 순간은 지난해 10월18일 새벽쯤 원다르마센터로 '자성을 회복하는 훈련'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서 일어났다. 난 그곳에 가면 산에서 달리기도 하고, 부모님도 잠깐 뵙는 등 여러 가지 계획으로 꽉 차 있었다. 또한 내 자신에게 있어서는 보다 침묵을 느끼는 시간을 갖고 워싱턴교당에서 4월부터 시작해서 느꼈던 기쁨 이래 지금 현재에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해서 더 깊은 단계로 나아가려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북쪽을 향해 가면서 보다 날카롭게 점점 더 찌르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더 속력을 냈다. 원다르마센터에 도착해서 누군가를 만나면 이런 불편한 상황이 없어지겠지, 거기 도착할 때까지 '등도 한 번씩 돌려주고, 자리도 맞춰 바꿔줘야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요약하면 나는 미래에 일어날 '그때'의 순간을 만들면서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운 좋게도 내가 공유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가 끝이 아니다. 그 찌르는 고통은 마침내 점점 더 심해졌고, 병원이라는 신호를 따라 급기야 고속도로를 나가게 됐다. 다음 순간은 응급실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진짜 법당과 같았다. 어마어마한 과학의 힘이 자비롭게도 모든 존재들에게 적용돼 있었다. 나를 살펴주는 모든 분들에 대한 큰 은혜를 받았다.

내가 대화한 사람들 중의 몇몇은 또한 삶의 심오한 난제들을 겪고, 자신들이 현재하고 있는 일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수술대에 누워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심장 수술 준비를 하면서 원불교의 선에 대해서 또 그들이 매일 겪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은 정말 극도로 평화롭고 초월된 고통이 사라지는 상황과 함께 이어졌다. 나는 그 순간 완전히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또 다른 깊은 경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와 무의 연관성, 따뜻한 보살핌과 자비로 둘러싸인 전체와 부분의 모든 존재와의 이어짐, 고요함과 영원함에 대한 지각, 혼자이지만 또한 혼자가 아닌 것, 찰나에 있어서도 분명히 개별적이면서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

일원, 혹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신, 하느님, 혹은 다른 영적인 존재와 신비주의적 화현, 과학과 철학적인 '포착'안에 혹은 그것을 넘어서는 종교, 이 모든 것들이 거듭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소태산대종사의 가르침의 접근은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게 신선한 창의 역할로써 함께 호흡하고 있다. 즉 때 묻지 않고 순수하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고, 서로 연결된 세계와 우주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

가장 난해한 부분은 소태산대종사께서 〈대종경〉 수행품 34장에서 말씀하신 험난한 길을 갈 때의 마음가짐으로 '평이함'이나 '쉬운 정도' 길을 갈 때의 순간들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물질과 비물질 그리고 천지의 조화로 엮어진 마술과 같은 현실에 초점을 맞추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내하기도 어렵다. 어렵고 복잡한 관계와 직면하는 것도 어렵고, 특히 매일 오고 가면서 우리가 보내는 우리의 시간들에 대해 항상 모든 이들에게 자비심을 가지는 것도 어렵다.

마치 뜨거운 날 시원한 바람처럼, 나는 워싱턴교당에서 그것이 가진 국한된 의미를 넘어서 여유, 충만, 그리고 친밀감을 느낀다. 특히 독경이나 기도 그리고 아침시간의 좌선과 기도를 통해서도 말이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서서히 스며들어 요란한 상황들을 점점 가라앉히고 순간순간의 취사에 행동에 집중하도록 희망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무님과 고승만 박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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