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삶이 일원대도에 귀의하여 오롯한 신심과 서원속에 기쁨과 법열로 승화시키고 육신의 고단함도 봉공·보은 일념으로 불태워 한 가정에 머물지 않고 교당과 교단에 바치셨으니 어찌 보람차고 뿌듯하지 아니하리요 참 장하고 거룩한 일생이셨습니다.'

이 글은 지난해 7월5일 84세로 열반에 드신 어머니(부타원 양연원)회갑식때 장충교당 황은규 교무께서 보내주신 축하의 메시지다.

어머님은 종로교당에 다니시던 이묘근 교도의 인도로 원기50년에 종로교당에 입교하셨다. 성동교당(현 장충)창립멤버로 참여해 보은 봉공교화에 모든 것을 바치셨다. 법회 참석을 생명처럼 아셨으며 서울회관 신축을 위한 천일기도도 무사히 완주하셨다. 후에 마련한 작은 옷가게는 교당 봉공회 물품들로 채워진 잡화점이었다.

이렇게 어머님은 공심으로 일생을 사셨다. 자식들을 향한 마음과 원불교 신앙생활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 응답이라 할까? 진리는 마지막에 다 응답해 주셨다.

상을 당하자 장충교당 1,2대 교무들이 첫날부터 상주하며 상주역할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3~6대 교무들은 모든 정성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열반 이튿날 12시 독경은 1~6대 교무들이 모두와 현 대전노은교당, 현 장충교당 교무, 역대 장충교당 부교무들 일부가 모두 한자리에서 모여 천도독경을 받으셨다. 종재때는 장충교당 역대 모든 교무와 1,2대 대전 노은교당, 현 장충교당 교무들이 한자리에 모여 또 한 번의 염원독경을 받으시며 가는 축복도 누리셨다. 이런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며 절대 진리는 노력한 만큼 응답과 은혜로 응해 주신다는것을 깨달았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재작년 법인절날 가정의 장기 계획으로 세종시로 이사를 했다.

장충교당을 떠나 본적이 없는 어머님을 설득하고, 가족교화를 위해 가까운 대전 노은교당으로 옮기자고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그건 허락이 아니라 자립이 없던 어머님의 포기였을 것이다. 이사온지 10개월만에 열반을 앞둔 어머님을 보며 가슴이 메였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은 어머님이 평생을 다니시며 보은·봉공·교화를 하신 장충교당에서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속교도가 아니란 이유로, 또 소속권리를 주장하며 상주들의 마음보다는 본인들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을 보며 지나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너무 그리워 하셨는지 원기52년 7월5일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날에 열반에 드셨으며, 3재까지 참석하고 종재때 본인 종교의식(기독교)대로 집에서 기도하던 며느리에게 나타나셔서 '나 이제간다 아이들 잘 키우고 애들 아빠와 사이좋게 잘 살아라'라는 당부로 마지막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떠나신 어머니.

나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심으로 다시 한번 장충교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장충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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