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과를 달게 받아 버려라'

▲ 이치섭 교도 / 대마교당
내가 대산종사를 처음 뵌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23세에 일등병을 달고 총부에 갔을 때 찾아뵌 적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면전에서 뵙기는 신도안에 계실 때였다. 신도안에 간 이유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서울 한강다리를 찾아가 세상 끝내려고 했던 시기였다. 참 철없는 생각이었다.

장성역에서 영등포역을 끊어야 하는데 왠지 서대전역 까지만 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신도안이 떠올랐다. '아, 그곳에 가면 대산종사님이 계시지. 인생 마지막 가는 길인데 어른에게 인사나 드리고 가자'하는 심경으로 찾아갔다.

신도안에 당도하니 한 교무가 "어쩐 일이냐"고 묻기에 "종법사님 뵙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조금 있으면 산책 시간인데 그때 뵈면 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식사까지 챙겨주셨다. 신도안 살림도 넉넉치 않았을 때인데 그때의 따뜻한 인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예타원 전이창 종사도 함께 계셨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드렸다. 예타원 종사는 "누구시더라"하고 기억을 떠 올리실 때 대산종사께서 "경륜이 동생아녀, 니가 어쩐 일이냐"하고 한 번에 알아보셨다.

대산종사에게 "정처없이 서울로 가다가 종법사님이 계신 신도안이 머리에 떠올라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고 대답했다.

나의 무거운 대답을 들으신 대산종사는 "니가 지금 삼세업장을 녹이는 중이다. 전생에 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냐. 모르지. 그러면 달게 받아라. 아무리 힘들어도 대종사님 법 만났을 때 잘 살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생에 이런 세상 안 만난다. 그러니 그냥 다 받아버려라"고 말씀 해주셨다.

대산종사의 말씀을 받들고 나니 답답하기만 했던 머리가 훤해졌다. '아, 성인의 위력이 이렇게 강한 것인가. 한 말씀을 해주셨을 뿐인데 참 대단하시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에도 '대산종사는 큰 성인이시다'고 마음으로 모셨는데 인생길을 열어주셨으니 그 마음이 더 간절했다.

이후 교당에서 19년간 교도회장을 하며 인과의 진리를 믿고 교당 일이라면 내 일처럼 돌봤다.

원평교당에 계실 때도 교무와 함께 갔지만 시봉금을 못 챙겨가서 조용히 뒤에 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대산종사는 "대마교무랑 교도회장님 뒤에 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하고 챙겨주셨다.

당시에는 가난했어도 행복했었다. 영모묘원에도 자주 갔다. 어른을 뵙는 즐거움이 있었다. 가서 뵙고 보면 마음이 환히 열렸다.

한번은 미국에서 교포가 와서 종법사님께 "이제 대한민국은 거의 교당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는 미국 쪽으로 힘을 밀어주십시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밀어 주지 않으면 힘이 듭니다. 조금만 힘 밀어 주시면 금방 발전이 되겠다"고 감상담을 발표했다.

대중들 박수가 크게 쏟아졌다. 오늘날 미국에 그렇게 많은 교당이 생긴 것을 보면 참 대단하고 성현의 위력이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이 외에도 영모묘원, 제주 국제훈련원 등 터 잡은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가 있고 신심이 절로 났었다.

요즘은 건강이 여의치 않아 전에 만큼 교당 공사를 다 보살피지 못하고 살지만 소일하며 힘들 때마다 '근지구지 대인지사, 사인사지 소인지사'라는 말을 되새기곤 한다. 즉 부지런히 오래하는 것은 대인들이 하는 것이고 잠깐하고 마는 것은 소인들의 처사이다.

최소한 소인배는 되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을 챙기고 살고 있다. 좋은 결실을 위해 농부가 밭을 갈 듯 이제는 마음공부 농사만 일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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