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원기 8~9년경).
산제당 초선에 참여하다

대산종사 집안인 김(金)씨 문중에서는 만덕산(萬德山) 8부 능선에 산제당(만덕암이라 부름)을 지어 놓았다. 그 만덕암을 비단장수하는 최도화가 맡아 관리하며 대산종사의 집을 자주 왕래했다.

최도화는 대산종사의 조모 노덕송옥에게 만덕산 만덕암에 산부처님(소태산 대종사)이 와서 계시니 가서 뵙자고 권했다. 대산 종사는 최도화와 조모의 대화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모가 만덕암에 갈 때 11세의 대산종사는 머슴 등에 업혀 함께 갔다. 만덕암에 당도하니 키가 자그만하고 잘 생긴 스님(정산 종사)이 마중을 나왔다. 대산종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한 스님이 동네에 왔을 때 동무들이 '중중 까까중' 하고 따라다니며 놀려 준 일이 있었다. 그 스님인 것 같았다.

대산종사는 생불님이 대포 만들 줄 아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한 달 남짓 생활하며 어른들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따라서 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뒷간(화장실) 가는 일이 걱정됐다. 한번은 뒷간에 갔다가 호랑이 우는 소리에 놀라 나오던 똥이 쑥 들어가 오도 가도 못하고 겁에 떨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암에서 최초 교화단 중앙단원인 정산 송규와 단원 오창건·김광선, 전주와 진안의 전삼삼·전음광·이청춘·최도화·노덕송옥·김대거, 서울의 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명의 제자와 원기 9년 (음) 5월 한 달 동안 김광선의 주관으로 선회(禪會)를 열었다.

만덕산 만덕암에서 1개월 선회를 마친 소태산 대종사와 제자들은 하산하여 그해 가을, 익산에 총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 한국전쟁 때 소실된 만덕산 초선터를 찾은 대산종사.


총부를 찾아가다

선회에 참석했던 대산종사는 선회가 끝나자 집으로 돌아왔다. 대산종사는 어려서부터 책을 펴놓고 지식을 익히기 보다는 '세상의 평화와 툭 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며 넓은 세계에서의 활동을 동경했다.

대산종사는 원기 11년 13세가 되자 자신도 모르게 만덕산에서 뵈었던 소태산 대종사가 뵙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스스로 총부로 찾아가 소태산 대종사께 "제가 지난 번 만덕산 선회에 참석했을 때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할머니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대종사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집으로 돌아가서 더 깊이 생각해 보아라"고 했다.

당시 총부는 도치원(道峙院) 초가 두 채 뿐으로 단촐 했다. 대산종사는 총부 선방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보며 '저런 일을 해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선방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 주로 쇠죽 끓이는 일을 조력하고, 만석평 농사일에 따라 다니며 몇 개월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는 대산종사를 해외 유학시켜야 한다고 했다.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 공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학을 떠나지 않고 14세에 전주에 있는 호영중학에 입학했다. 대산종사는 학교를 2년 동안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학교를 그만 둔 대산종사는 집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당숙과 종형들이 대산 종사를 유학 보내자고 다시 권유해 왔다. 집안 분위기가 유학으로 무르익어 갈 때 조모와 모친은 유학을 가더라도 생불님(소태산 대종사)을 한번만 더 만나보고 가라고 권유했다.

어느 관상 보는 사람이 조모에게 대산종사가 '30대에 큰 부자가 되나 명이 짧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조모와 모친은 생각 끝에 귀한 아들은 스님에게 인연 맺어주는 풍습에 따라 생불님께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 만덕산 초선지(왼쪽)와 신축된 원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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