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진 교도/이문교당
꽃 안 핀 봄은 없다. 거꾸로 말하면 꽃이 피지 않으면 봄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봄이 온다는 약속이 있다. 긴 겨울의 여울에 서서 황량한 텃밭을 본다. 배추를 심었던 이랑과 그 옆 무·갓·고추 등 차례로 줄을 지어 지난 날 푸름이 너울거리던 자취도 없이 땅은 침묵 속에서 새로운 씨앗을 품어 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입춘이 지났으니 이미 봄은 시작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실눈을 뜰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신들이 염원하는 것들을 마음속에 새기고 한해의 시작에서 정성으로 실천하려 노력할 것이다.

혼자 한 계획은 나태해지거나 게으른 마음이 찾아오면 변하기가 쉽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 발표하거나 함께한 계획은 다소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쉽게 포기하거나 중도에 멈출 수가 없다. 혼자 한 결심이나 타인과 함께한 약속은 신용이라는 인과 관계를 따라 결실로 이어진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 하늘을 나는 새와 동물 일반 모든 사물이 한해를 준비하고 나름대로 때에 맞추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저 할 일을 하며, 자연에 순응하여 태양과 대지와 물과 바람의 은혜를 입고 살아간다. 동식물도 그러한데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에 속해 있긴 하지만, 억겁의 세월 속에 용케 사람으로 태어나 원불교라는 은혜의 씨앗을 품고 법의 물을 받아 마시며 감사의 결실을 맺을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인연이라는 수레바퀴 속에서 교화의 입춘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더워지지 않은 교도들의 가슴은 원불교의 토지라고 본다. 그 토지가 원불교라는 씨앗을 뿌린 만큼 많이 개화 하지 못하는 것은 교무들의 소중한 법물을 제대로 받아 마시지 못한 탓일까? 햇살 같은 선진의 찬란한 빛을 가슴에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 바람 같은 동지 교우들 훈풍의 혈심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교무들의 무심으로 하여 목마른 대지가 된 교도의 가슴에 아직 은혜의 법물이 스며들지 못해서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꽃샘추위처럼 여기저기서 시샘하는 타 종교의 기세에 눌려 눈치를 살피느라 선뜻 오지 못한 봄, 그 봄처럼 주춤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턴 원불교의 땅이 척박하지 않게 네 가지 양분 '법물', '법빛','법풍', '법마상전'으로 거두고 살펴서 굳건한 기세로 은혜와 감사의 봄을 장만 했으면 한다.

분명 우리는 개교100년이 목전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 선진님들이 신성으로 목숨 바쳐 일궈 놓으신 이 땅에 이미 원불교의 봄이 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풍류로 세상을 건지자'는 법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바람 나는 법문이다. 글 그림 소리 등 다양한 문화 예술로 우리의 원향을 마음껏 부려 쓸 수 있는 소재이다.

선진과 후진이 어울려 법문에 취해 우리의 향기로 글을 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노래로 불러 준다면 또 춤으로 덩실덩실 추어 보인다면 어른 아이 남녀노소가 모두가 원 흥에 한마당으로 일원의 꽃자리에 머물러 잔치를 벌여 보면 좋겠다. 그 신명으로 더욱 하나가 될 우리의 그날을 기다린다.

올해는 대산종사탄생100주년을 기념하고 원100을 기둥 삼아 큰 꿈을 가꾸는 해다. 원불교 은혜의 씨앗을 뜨겁게 품고 법문의 물을 흠뻑 마신 후에 예술의 싹을 틔워 오직 감사의 결실로 원불교 오만년의 미래를 내다보며 예술로 교화 꽃을 만발케 하는 봄을 준비하고 싶다.

경산종법사는 이러한 뜻에서 "원불교 문화를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라는 신년 화두를 던지셨다. 이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면서 그동안 일원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했던 결과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스승들께서 회상의 정체성을 견고히 지켜주셨다면 우리는 이제 생활 속에서 언어와 글과 삶의 방식으로 일원의 문화를 승화시킬 수 있도록 각자 각자가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내야 한다. 원불교 용어부터 적극 활용해 보자. 스승님들께서 물려주신 정신을 내 삶의 자세로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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