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무욕의 공심으로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적공과 봉도청문(奉道聽聞)의 신성으로 수행과 교화활동을 한 수행자. 무사무욕(無私無慾)의 공심으로 교단의 기초를 놓고 교단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는 연마로 정성을 다한 항산 김인철(亢山 金仁喆, 1934~2011) 종사.

그는 원기36년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를 했다. 원기37년 도양교당 교무 향산 안이정 종사의 요청으로 도양중학원 교사로 4년을 일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일체유심조니 마음병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수학시절 중앙교우회 회장으로 일을 하다가 시비에 크게 휘말려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정산종사께 "제 힘에 겨운 난처한 경계가 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하고 여쭸다. 답하시기를 "억지로 상대해서 돌파하려 말고 침묵으로 일관하라. 사심없이 무념으로 대처하면 자연히 풀린다. 시비를 시비로 해결하려면 어렵지만 침묵으로 살리는 것이 방법이다."

원기44년 원불교학과 졸업을 앞두고 건강이 악화되어 휴학을 하게 됐다. 대산종사께서는 "욕심이 없어야 큰 공부를 이룰 수 있고, 남의 재주를 내 재주 같이 여겨야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법문을 내렸다. 이 법문이 그의 일생 공부 표준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갔다.

졸업 후 원기46년 장수교당 교무를 시작으로 구포교당, 교정원 교무부, 수위단사무처, 총무부, 기획실 등 교단의 요로에서 혈심을 다했다. 원기70년 교단 창립 2대말 및 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회 사무총장에 이어 교정원장, 원광학원 이사장, 중앙중도훈련원장 등의 요직을 수행했다.

성업봉찬회 사무총장을 수행하며 성지장엄 불사 등 보본사업과 학술, 출판, 문화예술 및 국제행사를 진두지휘하며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교정원장 재직시엔 '일원문화 창조와 낙원공동체 건설'이란 목표아래 법과 원칙에 입각한 교정의 합리화·효율화·세계화에 노력했다. 또한 원광학원 이사장으로 일하며 '원광학원 법인 자립화'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이처럼 바쁜 가운데서도 일원문화 정체성과 방향 정립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정성을 쏟았다. '우리교법이 한국사상의 총 결산이요, 한국사상을 세계화한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문화운동을 구체화 하기위해 '일원문화 재단'을 설립하는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또한 대산종사의 경륜을 받들어 U·R실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퇴임 후에는 시드니교당, 호주 선문화원, 호주 보화당한의원 설립을 도우며 일원대도의 세계화에 헌신했다.

그는 원로원에서 낙도생활을 하며 평소에 좋아하던 서귀포에서 상산 박장식종사의 열반소식을 접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나도 따라가야 한다"며 화사한 오월을 뒤로 한 채 훌훌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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