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히 일어나 어허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리겠구나'

생각은 '사건'의 발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사건과의 '마주침'이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그 사건에 대한 '해석'의 과정이 '생각'이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예외적인 '사건'의 발생일 경우 '생각'은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소중한 삶을 후회 없이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적 사유다. 철학적 사유가 우리에게 불편함과 당혹감을 준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불편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바라보고,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생각'. 그러나 삶 속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일들의 낯설음에 당당해지는 길 또한 '생각' 속에 있음을 깨닫고 있다.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각자 삶의 '사건'이, 생각 더 나아가 철학적 사유를 통해 치유되는 것이다.

완주 봉서사로 향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생전에 가보고 싶어 하던 장소가 세 곳이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금강이 드러나면 조선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산 중의 보석 금강산. 둘은 조선 중엽을 풍미했던 무애도인 진묵이 주석하던 봉서사. 셋은 개벽세상을 꿈꾸었던 수운이 도통했다는 경주의 용담정이라 했다.

"진묵대사도 주색에 끌린 바가 있는 듯 하오니 그러하오니까?" 제자의 물음에 소태산대종사는 답했다. "내 들으니 진묵대사가 술을 좋아하시되 하루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간수를 한 그릇 마시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 한다. 또 한 번은 감나무 아래에 계시는데 한 여자가 사심을 품고 와서 놀기를 청하는지라 그 원을 들어 주려 하시다가 홍시가 떨어지매 무심히 그것을 주우러 가시므로 여자가 무색하여 스스로 물러갔다는 말이 있나니, 어찌 그 마음에 술이 있었으며 여색이 있었겠는가. 그런 어른은 술 경계에 술이 없었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如來)니라."

진묵대사가 머물렀던 봉서사를 가기위해 30리 길을 걸었던 소태산대종사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오랜 시간 내 마음속 불편함으로 닿아있는 '사건'에, 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이번 길을 나선 또 다른 이유도 마음 안에 담겼다.
▲ 진묵대사 부도탑.
봉서사는 조선 선조 때 진묵대사가 출가하고 머물던 유서 깊은 절이다. 이곳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08호인 진묵대사 부도가 있다. 봉서사를 안내하는 비석이 보였다. 이어 충경유격훈련장이 나왔다. 최근 35사단이 임실지역으로 이전되면서 훈련장 곳곳 빈 집 마냥 썰렁한 기운이 감돌았다. 칼칼한 겨울바람에 몸과 맘을 여몄다. 깊은 산길, 멀리 보이는 경관이 수려하다. 사백여 년 전 진묵대사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동선 해제식을 마치고 소태산대종사는 선원들에게 말했다. "내가 들은즉 전주 부근에 있는 봉서사 진묵대사의 부도 한 면이 점차 희어진다 하니 내 한 번 가보리라."

한때 경내지가 60만여 평으로 15동의 전각과 9개의 소속 암자가 있을 정도로 큰절이었다는 봉서사 진묵대사 부도탑에 올랐다. 진묵대사부도는 지대석을 제외한 전체 높이가 179cm이다. 하대석 팔각주 앞면에는'진묵당일옥(震默堂一玉)'이라 새겨져 있다. '열반 후 자신의 부도가 희어지면 자신이 이 세상에 출세한 줄 알으라' 했다던 진묵대사 부도. 오랜 세월, 세속의 거친 풍랑을 그대로 견뎌내고 있었다. 낡고 낡아 닳아진 부도탑. 그 앞 세련되고 튼튼하게 세워져 있는 불전함에 부도탑은 남루하기까지 했다. 마음이 허해졌다.

진묵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진묵전을 향해 내딛는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고 산을 베게 삼았던' 진묵대사의 영정. '달을 촛불삼고 구름을 병풍삼고 바다를 술통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어허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리겠구나' 범종각 기둥에 새겨진 그의 시를 떠올렸다. 그가 남긴 게송이다. 속가 사람처럼 술을 좋아하고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을 보였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시공을 초월하는 삼매에 빠졌다는 그. 무애행을 행하며 서민불교를 밝힌 성자의 영정이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며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 들이 있다. 그러나 흔들리는 나를 보며 불편함과 당혹감을 견뎌오고 있다. 불편할수록, 당혹스러울수록,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싶다. 나의 '생각'은 여기에서 한참을 멈춰져 있다.
봉서사 계곡 회춘교를 바라본다. 모진 한파 이겨낸 동백 꽃봉오리, 봄이 오고 있다.

세속의
거친 풍랑 견뎌내는
진묵대사 부도탑
그 앞 세련되고 튼튼하게
세워져 있는 불전함에 비해
부도탑은 남루하기까지 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