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자신감과 따뜻한 인간애로 뭉친 지칠 줄 모르는 불멸의 청년. 진보적 행보로 교단의 앞날을 헤쳐 간 개척자.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보처불로 교단 창립에 온통 심신을 불사른 주산 송도성(主山 宋道性, 1907~1946)종사. 그는 4세부터 조부로부터 한문 사숙을 하며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해 13세에 문리를 터득했다. 정산종사의 아우이자 대종사의 사위라는 특별한 혈연적 위치는 물론 교단 최고법위인 대각여래위에 오른 것은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

정산종사가 대종사의 제자가 되자 전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했다. 이후 원기7년 16세에 봉래정사에서 제법중인 대종사를 찾아가 출가를 서원했다. '마음은 스승님께 드리고, 몸은 세계에 바쳐서 일원대도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겠다(獻心靈父 許身斯界 常隨法輪 永轉不休)'란 출가시는 많은 후진들이 보감을 삼고 있다.

원기10년 수위단 보궐선거에서 19세에 수위단원이 됐다. 원기11년 경성교당 교무를 시작으로, 총부 서무부 서기, 원기13년 연구부 서기로 봉직했다 이때 〈월말통신〉발행을 제안해 대종사로부터 '갑(甲)'이란 감정을 받았다. 그는 주간이 되어 원기13년 5월 창간호를 발행했다. 세계적 불황속에서 어렵게 간행되던 〈월말통신〉은 원기15년 12월까지 34호를 발행하고 중단됐다.

원기17년 영광지부 교무부장 겸 지부장으로 발령받아 가뭄으로 인한 재해극복에 힘을 다했다. 원기22년 31세에 교정원장에 피선되어 교단 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쏟았다. 이후 총부 교감과 다시 영광지부장을 역임하며 법풍을 진작 시키며 후진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금강원인(金剛院人)','직양(直養)'이란 필명으로 다양하고 많은 문필을 남겼다. 논설문, 추도문, 기행문, 시가, 서한 등 다방면에 걸쳐서 발표했다. 특히 대종사 법설 수필과 고문헌을 발췌한 〈불해탐주〉, 〈수심결 역해〉 등은 눈에 띄는 내용들이다. '진경', '오 사은이시여!', '임께서 내 마음', '오늘 아침 좌선 때에'등은 성가로 작곡돼 교도들의 신앙 수행을 고취해 주고 있다.

원기30년 해방을 앞두고 영산지부장에서 총무부장으로 전임됐다. 이 무렵 일제는 〈정전〉과 〈회규〉를 일제의 국체와 국책에 맞게 개편할 것을 강요했다. 책임자를 회유하여 종법사의 인준 받는 절차만 남아 있었다. 새로 부임한 그는 '증산대'를 조직하고 보국정책에 응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듯 하며 시간을 끌다 황도불교화의 시도를 지연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전쟁고아 보호 시설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가 됐다. 그러나 서울에서 구호사업을 전개 하던 중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원기31년 40세란 아까운 나이에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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