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훈장을 하신 조부와 초등학교 교사로 40년간 봉직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교육'이 천직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1991년 원창학원과 인연을 맺게 됐고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온지 어느덧 23년이 된다.

과학교사로 담임, 연구부장, 교육정보부장, 진학부장, 복지상담부장, 교무부장을 거치며 원불교 교도로서 신앙과 수행이 일치하는 인생을 살고자 노력했다.

공경과 성실로 대변되는 원불교인의 삶의 자세는 무언 속에 내 안의 삶의 철학으로 자리잡게 됐고, 이 모든 것이 교당생활을 하면서 체득된 지혜라 생각한다.

교육현장은 생각보다 매우 치열하고 마음을 챙기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일이 많다. 교사와 학생간의 위화감이 조성되지 않도록 '교사'라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들을 이해하며, 학생들 곁으로 먼저 다가가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형 같고 아버지 같아야 한다. 부족하지만 다정다감한 교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불교 룸비니활동을 했다. 다행히도 대학시절 친구의 권유로 원기71년 1월 북일교당에서 입교하게 됐고, 교전을 봉독하고 사경하면서 대종사께서 펼쳐주신 교법에 매료되어 정법회상을 만난 기쁨과 사종의무를 실천함을 표준삼아 살아간다. 그후 청년회와 청운회 활동, 전국원불교 교사회 사무국장과 부회장 업무에 매진하다 현재는 북일교당 교도부회장 및 교화협의회의장, (사)솔솔송자원봉사대 사무총장으로 미약하나마 은혜에 보은하고자 한다.

27년 전 교단 일에 열심히 한 모습을 보셨던지 대산종사께서 왕궁 영모묘원에 계실 때 장산 원로교무와 박성석 교구장으로부터 출가 권유를 받고 고민하게 됐다.

그러나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면서 자신감 부족으로 선뜻 출가 결심을 하지 못했다. 나를 믿고 격려해주신 분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재가로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늘 마음 한 켠에 어른들의 뜻을 거슬렸다는 죄스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무제도가 운영될 때에도 주변에서 수차례 권유를 받았으나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서원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원기92년 아주 큰 경계가 닥쳤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강급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한계를 절감했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경계를 대할 때 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말라'하신 대종사의 말씀처럼 경계와의 만남을 통해 재가 교도로서의 삶을 뛰어넘어 출가교역자로서 성불제중의 원대한 서원을 이루고 싶다는 절실한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됐다.

교사회 훈련을 기획 진행하면서 원불교인 육성, 교육자 육성, 교화자 육성인 교사회 목표를 고민하게 됐고, 학교생활과 솔솔송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만나지는 1500여명의 청소년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싶었다.

원기93년 청소년교화자대회에 참석하여 청소년교화에 고민하는 교역자들을 접하면서 이제 재가가 앞장서서 함께 하지 않으면 원불교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교사교도를 활용한 청소년교화 방안으로 제도적인 방법 마련'이라는 제안을 하게 됐다.

원불교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교화에 대해 고심하며 방안을 마련하던 중 교당으로부터 원무 서원 권유를 받고 '교화대불공으로 낙원세상 건설의 역군'이 되겠다는 신념으로 원기93년 4월, 마침내 원무에 지원하게 됐다.

<북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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