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길 교무의 '수심결'

어떤 이는 선악의 성품이 공함을 알지 못하고 굳이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여 몸과 마음을 억지로 눌러 항복 받기를 마치 돌로써 풀을 누르는 것과 같이 하면서 써 마음을 닦는다 하니 이것이 크게 미혹함이로다. 그런 고로 이르시되 "성문은 마음 마음이 미혹을 끊되 능히 끊는 마음이 이 도둑이라" 하시니, 다만 살생과 도적과 간음과 망어가 성품으로 좇아 일어남을 자세히 관하면, 일어나되 곧 일어남이 없는지라 당처가 문득 고요하나니 어찌 반드시 다시 끊으리오. 그런 고로 이르시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침이 더딤을 두려워하라" 하며 또 이르시되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치라. 깨치면 곧 없어진다" 하시니, 그런고로 깨친 사람의 분상에는 비록 객진 번뇌가 있으나 한 가지로 제호를 이루나니 다만 미혹된 마음이 근본이 없는 자리를 비추어 보면 허공 꽃과 같은 삼계가 바람에 연기 같이 걷어지고 육진 번뇌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하리라.

或者는 不知善惡性空하고 堅坐不動하야 捺伏身心을 如石壓草하야 以爲修心하나니 是大惑矣로다 故로 云하사대 聲聞은 心心斷惑호대 能斷之心이 是賊이라하시니 但諦觀殺盜滛妄이 從性而起하면 起卽無起라 當處便寂이니 何須更斷이리오 所以로 云하사대 不怕念起하고 唯恐覺遲라하며 叉云念起卽覺이라 覺之卽無라하시니 故로 悟人分上에는 雖有客塵煩惱나 俱成醍醐니 但照惑無本하면 空華三界가 如風券煙하고 幻化六塵이 如湯消氷하리라

24장에서 보조는 마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수행의 폐단을 걱정하고 있다.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참마음은 고요하고 텅 비어 있지만 동시에 또렷하게 알아차리는 밝은 지혜도 수반하고 있다. 그 원리를 깨치지 못하고 소란함과 번잡함을 피하여 홀로 토굴을 파고 형식적인 수행에만 몰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당나라 시대의 마조(馬祖道一, 709~788)는 스스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부처가 되려고 억지수행에 몰두하는 제자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도록 일침을 가했다. 그러한 가르침을 알려준 사람은 육조 혜능의 5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남악 회양(南嶽懷讓, 677~744)이다. 남악은 첫 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마조가 범상치 않은 그릇임을 알고, 이렇게 떠 보았다.

"자네 지금 무얼 하고 있나", "보시다시피 좌선을 하고 있지요", "좌선은 해서 무엇하려는가" 마조는 의외라는 듯 "부처가 되려구요" 다음 날 남악은 마조의 선방 앞에서 기와를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사각대는 소리에 눈을 뜬 마조가 남악에게 묻는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보시다시피 기와를 갈고 있지", "뭐하시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마조는 크게 웃으며, "아니, 기와를 갈아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악은 마조의 말을 잡아채어 "그렇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듯이 퍼질러 앉기만 한 채로 어떻게 부처를 기약하는가" 벼락을 맞은 듯한 전율을 느낀 마조가 남악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수레가 안 간다면 소를 쳐야 하는가, 바퀴를 쳐야 하는가" 남악은 정형화된 자세로 부처를 이루리라던 마조를 위해 최상승의 법문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엄격하고 절도있는 생활과 소승적 명상이 깨달음으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부처와 중생 사이, 그리고 깨달음과 미혹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 순간이 영원이고, 현실이 곧 궁극이고, 자기가 곧 부처이다. 가리고 따지는 마음,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인하여, 부처의 길은 자꾸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돌로 눌러 놓은 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 자체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친다면 한 바탕 배꼽을 잡으며, "소 위에 타고 앉아 소를 찾고 있었네"라며 자신의 그동안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깨친 이는 모든 번뇌가 마치 끓는 물에 얼음이 녹는 것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보조가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깨침이 더딘 것을 두려워하라는 이야기는, 번뇌를 일으키는 생각 자체를 없애려 씨름하지 말고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관조하라는 것이다.

텅 비어 고요하면서도 무언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그 자리를 빨리 깨치라는 자비의 목탁 소리이다.

아집과 무지를 벗어나고 보면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이며, 도는 평범한 일상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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