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교당 박용덕 교무
소태산, 학명·만해·용성과 교류

소태산대종사를 포함한 근세 불교개혁운동의 흐름을 짚어본 연구발표가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24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월례연구발표회에서 군북교당 박용덕 교무는 소태산대종사가 백학명, 한용운, 백용성 등과 교류하면서 근세불교 개혁운동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원불교 교사 연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그는 "소태산대종사는 불교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인 교단을 만들어 재가주의 불교운동과 여권신장운동으로 당대 괄목할만한 불교개혁과 발전을 보였다"고 발표했다. 그는 소태산이 한용운과 12세 연하로 토끼띠 동갑, 한용운은 백학명과 12세 연하 토끼띠 동갑임을 인지하고, 이들의 사상적 교류와 영향이 근세 불교 개혁운동의 지평을 넓혔다고 분석했다.

그는 "한용운은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통도사에서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 열람하고 주요 경문을 초출했다"며 "1913년에는 통도사 강원 강사로 부임, 대장경초를 편집한 것으로 강의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해 5월 〈조선불교유신론〉을, 1914년 4월에 〈불교대전〉을 발간하는 동안 소태산은 대각하고 이듬해 불갑사에서 금강경 목판본을 구해 읽고 무한히 법열을 받아 이어 이교담의 〈팔상록〉(1913, 중앙포교당)과 만해의 〈불교대전〉(1914, 범어사)을 읽게 된다"고 말하며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지런 활달하고 궁금증 많고 막힘이 없는 소태산은 대각 후 길룡리 촌구석에 박혀 있지 않았을 것이다"며 "구수미, 법성, 영광 장날이면 빠지지 않고 다니며 시국의 동향을 관찰하는 한편, 〈금강경〉을 본 이후로 그 감동을 이기지 못하여 불갑사에도 수차례 찾아갔을 것이다. 당시 불교신서인 〈불교대전〉 〈팔상록〉과 〈선요〉를 열람하는 동안 한 가정의 장자인 백학명이 절 아랫마을 고향(불갑면 방마리)에 다녀갈 법하니 두 사람이 만났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백학명은 불교혁신 경륜에 지기가 상통하는 만해 한용운을 1923년 고창군 고수면 청량산 문수사 산내암자 양진암(養眞庵)에 청했다고 말한 그는 "백학명은 백양사 주지 만암(曼庵)으로부터 내장사 큰절에 와 법을 펼 것을 권고 받으나 하산할 생각이 없었다"며 "만암은 한용운에게 와서 학명이 내장사에 와서 법을 펴게 해달라고 청한다. 만해는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에게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께'라는 한시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백학명에게 '이제 그만큼 닦았으면 되었으니 혼자 천상락을 누리지 말고 세간에 나와서 중생 구제 사업하라'는 뜻이다. 한용운이 백학명에게 내장사 부임을 정중하게 권고함을 촉구한 한시였다.

그는 "백학명은 이틀 밤낮을 선원 뜨락에 주장자를 짚고 서서 고민했다. 백학명은 노구(老軀)에 일 많은 큰절에 나서기 싫었다. 뜻을 같이 하는 젊은 거사가 있으면 안심하고 내장사에 갈 것 같았다"며 "월명암에서 수차례 하산해 실상동에 갔으나 석두거사는 모친 병보를 듣고 영광에 가 돌아오지 않았다. 내장사 주지로 가게 된 백학명은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창해, 놀고먹는 스님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불교 개혁을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이 시기에 소태산은 전주에서 불법연구회 발기인 모임을 갖고 동짓달에 봉래정사로 돌아왔다. 승속이 합작하여 불교를 중흥시켜보자는 학명스님의 당부에 차마 거절 못하고 정월대보름에 내장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소태산은 갑자년 연초에 새 회상 전무출신을 서원하는 제자 5명을 선발대로 내장사에 보냈다"며 "예상대로 5인 선발대는 산중 승려들의 반대로 절집에 발도 들이지도 못하고 절 아랫마을에 대기하고 있었다. 재가출가 합력하여 불교중흥사업을 하자는 계획은 무산되고 철도교통의 요충지인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립하고 신룡벌에 본관을 건설하게 됐다"고 상황을 전했다.

그는 "1924년 3월30일 최도화가 소태산을 안내해 상경, 박사시화·박공명선 쌍둥이 자매를 제자로 맞는다. 이어서 이동진화와 이공주가 입교하게 된다. 이공주의 모친과 언니, 조카 민자연화·이성각·김영신도 입교한다. 그들은 대각사 신도로서 백용성이 총애하는 제자들이었다"고 덧붙이며 대각교와 교류도 활발했음을 지적했다.

소태산의 경우 1926년 3월, 낭비가 심하고 번거한 관혼상제 구 예법을 청산하고 새 예법으로 대폭 간소화해 4기념법을 제정해 불교 개혁운동에 앞장섰다고 강조했다. 한용운은 승려의 기본적 인권을 강조한 '승려결혼허가서'를 중추원과 통감부에 제출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체계화 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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