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水德)의 성자

천성이 자상하고 인자해서 자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자비의 화현. 후진들의 따뜻한 품안이 되어주고 깨우쳐 주는 허식이 없는 진솔한 수덕(水德)의 성자 응산 이완철(應山 李完喆, 1897~1963) 종사.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9세에 한문 사숙에 입문하여 출중한 능력을 인증 받을 만큼 경서에 밝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원기6년에 친형인 도산 이동안 대봉도의 인도로 대종사를 친견하고, 마치 공자님을 보는 듯 황홀하여 제자 되기를 청하고 일원대도에 귀의했다.

원기15년 34세 늦깎이로 전무출신을 서원하고 농업부원으로 일했다. 원기17년에 학원교무, 원기18년부터는 서울교당 교무로 12년을 봉직했다.

한번은 대종사가 그에게 "서울역까지 짐을 지고 가자"고 하자, "위신이 손상될까봐 가기 어렵다"고 했다. 다른 제자와 서울 역에 다녀온 대종사는 "짐 하나 지기가 부끄러워 스승의 명을 어기고도 반성이 없으니 당장 사가로 돌아가라"고 꾸짖었다. 이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로는 허식을 부리는 일이 없는 진솔한 도인으로 칭송을 받았다.

해방되던 원기30년 영산지부장으로, 원기33년에는 총부교감으로 봉직하고 후진들을 지도하며 속 깊은 정진을 했다. 대종사 열반 후에는 정산종사를 알뜰히 보필했다. 특히 6·25가 일어나자 정산종사를 도와 총부를 사수했다.

원기43년 교정원장을, 원기47년에 감찰원장의 중책을 맡아 교단의 어버이 역할을 했다. 그는 총부의 이곳 저곳을 살피며 후진들의 기숙사에 가서 "어떻게 사느냐" "방은 따뜻하냐"며 일일이 묻고 챙겼다. 또한 일선교화에서 애쓰다 총부에 찾아오는 후진들은 의례히 무슨 일이건 다 털어 놓으면 언제나 안심과 용기를 주었다.

교정원장 재직시엔 신임교무가 부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편지를 띄웠고, 어려운 교당과 건강이 여의치 않은 교무에게는 답장을 불문하고 편지로 위안을 주었다. 이런 심법은 대중의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모았고, 동지간에 윤기가 흐르도록 했다.

그는 설교 단상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항상 서두에'그러면~'으로 시작해서 중간 중간에 '또로 말할 것 같으면~'을 사용하며 말문을 이어갔다. 언체는 약간 불분명했으나 소박하면서도 깊은 진리의 소식이 실생활에 부합된 명 설교였다. 또한 문필에도 능해 '장부의 원' '우리의 보물'등 초기교단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이런 왕성한 문학활동은 종교적 위상 못지않게 문학적 위상도 높다.

원기48년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됐다. 교무강습 중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단상에 올라 '불법을 물같이 활용 하라'는 요지의 사자후를 남기고 깊어 가는 가을 밤 주위를 물리친 후 자는 듯 사바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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