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함께보는 구슬

청년대종사를 만나 전탈전신(全奪全信)의 귀의로 부처님 회상의 수달장자, 공자님 문하의 자공과 같은 역할을 하며 기다리고 찾은 약조 깊은 만남. 대종사를 가까이 모시며 법설을 가장 많이 수필하여 〈대종경〉 결집에 지대한 공을 남긴 '법낭(法囊)' 구타원 이공주(九陀圓 李共珠) 종사.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성품이 고결하며 의지가 굳세어 시종일관하는 정성스러움이 있었다. 6세에 한글을 깨쳐 고소설을 읽었고, 8세에 천자문과 소학 등을 익혔다.

교육환경과 인연복도 특별해 12세엔 조선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을 한 하란사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는 행운도 얻었다. 이후 이화학당, 동덕여자의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운봉 사는 박장성과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나 결혼생활 8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등지는 아픔이 있었다.

대종사와 만남은 원기9년 11월 박사시화, 박공명선 선진의 안내로 대종사의 두 번째 상경 길에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대종사는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내렸다. 훗날 대종사는 '법명을 공주라 한 것은 세계의 인류가 모두 함께 보는 보배로운 구슬이 되어 달라'는 뜻이라는 서한을 보냈다.

원기10년, 그의 30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대종사는 "공주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소"하고 물었다. "여고시절부터 1천만 조선 여성들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문학박사가 되어 글을 써서 계몽시키려 생각 했습니다" "생각을 넓혀 도덕박사가 되어 세계 전체여성, 더 나아가 일체생령을 제도할 생각은 없는가" 이 말씀을 받들고 발심을 했다.

원기15년 출가하여 서울교당 교무로 창립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원기16년 여자수위단 시보단이 구성될 때 중앙위에 선임됐다.

원기17년, 통신부장 겸 연구부장의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대종사의 법문을 가장 많이 수필한 제자로 훗날 〈대종경〉 편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종사께서는 '법낭'이라 불렀다. 그는 문학, 비문학을 막론하고 교단 기관지에 당대 인물 중 가장 많은 글을 발표했다. 시가, 논설, 감각감상, 산문 등 다작을 쏟아냈다.

또한 '전무출신 찬송가' '거진출진 찬송가' '교도의 노래' '공덕탑 노래'등 성가를 작사해 교도들이 즐겨 부르며 신앙 수행을 진작 시키고 있다. 그리고 제1대 성업봉찬회 회장으로 봉직하며 펴낸 〈원불교 제1대 창립 유공인 역사〉 전7권은 교단의 중요 사료로 남아있다.

또 다른 업적중 하나는 재산을 교단운영의 적재적소에 사용한 일이다. 각종 초기교서 인쇄비, 대각전건축, 제1대성업봉찬사업 등에 막대한 정재를 희사했다. 이 후에도 개교반백년기념사업, 서울수도원과 서울보화당 설립, 서울회관 건립, 성지개발 사업, 인재양성과 해외교화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부처님 회상의 수달장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원기42년 '제1차 법훈증여식에서 교단 최초로 대봉도의 법훈을 받았다. 가히 공부·사업 간에 복혜를 쌍수한 길이 남을 공덕탑을 쌓은 대종사의 으뜸 제자였다.

원불교 100년 역사에 '세계가 함께 보는 구슬이요, 교단의 대들보'라는 찬사로도 모자랄만한 큰 업적을 남긴 거룩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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