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일도 즐기면서 임하는 자세

▲ 김도훈 교도/화정교당
대산종사를 떠올리면 왜 거룩한 성자보다는 따뜻한 할아버지가 먼저 떠오를까? 이런 감정이 비단 필자에만 한정된 것일까? 아마도 필자가 대산종사를 뵌 시기가 주로 매우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대산종사를 처음 뵌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선친 김치국 교무가 내 손을 잡고 교단 어른들께 인사드리게 했던 원기60년이었다.

먼저 총부를 방문하여 지금은 고인이 되신 많은 원로교무들의 축하를 받았고 그분들이 선뜻선뜻 내놓으신 격려금들은 필자가 공부를 시작하는 데 작은 종자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당시 계룡산에 자리잡고 있던 삼동훈련원이었다. 그곳에서 요양하시던 대산종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알현하러 온 많은 출재가 교도님들과 함께 계룡산 자락을 함께 오르셨다. 마을길을 지나면서 만난 불종불박이 새겨진 바위를 가리키며 왜 이 자리가 원불교의 제2의 고향이 되어야 하는지 역설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렇게 모두가 함께 30~40분 정도 올라 다다른 계곡 가까운 넓은 공터. 그곳이 대산종사가 야단법석을 열던 자리였다. 거의 40년 전의 일이라 다 잊어버린 것 같더니 그 야단법석의 모습들이 다시 생생하게 영상처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대산종사 회고사진집에 그 야단법석의 한 모습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필자는 그 속에서 혹시 하면서 부친과 필자를 찾으려고 헛수고를 한 후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가장 큰 기억은 김이현 종사께 요청하여 복식호흡의 실제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게 하셨던 장면이다.

반듯이 누워있는 김이현 종사가 들 숨을 쉴 때 가슴을 지나 단전에 이르기까지 숨이 지나가는 모습이 너무 확연하여 어린 필자의 눈에는 신비롭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자리에 함께 한 재가교도들은 모두 좌선할 때마다 그 모습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렇게 법잔치가 끝나면 으레 따라오던 재롱잔치의 순서. 모든 재가 출가들이 한 가지씩 재롱을 부려야 하는데, 필자는 부친께 산토끼를 부르게 하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추어 가사를 거꾸로 불러 대산종사의 박수를 이끌어 냈다. 그렇게 대산종사의 첫 할아버지 이미지가 내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성자로서 그리고 한 종교의 지도자로서 내세우는 위엄, 장엄 등은 뒤로 밀쳐두고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전 교도들을 맞이하고 대화하고 함께 웃고 그러면서도 법의 길로 이끌어 주시던 모습은 이웃 종교의 용어를 빌어 쓴다면 바로 '낮은 곳으로 임한 성자' 그 자체였다.

그 이후에도 서울대 원불교 학생회를 이끌고 갔을 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결혼했을 때, 첫아이를 보았을 때, 유학을 떠날 때 그리고 매년 신년하례 때 등등 계속 대산종사를 뵈러 갔지만, 내 기억 속에는 종법실에서 맞아 주시던 모습보다는 영모묘원 비닐하우스 아래서 각기 다르게 만든 좀 위태로워 보이던 의자에 앉게 하고 맞아 주시던 그 모습이 더 생생하게 남아 있다.

실은 내 사진 속에는 종법실에서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때로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시고 다정하게 찍은 모습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왕궁상사원 비닐하우스가 남아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그 이후 건강 때문에 법좌를 물려주시고 상사가 되시고 주로 찾아뵌 것은 수계농원 조그만 방에 계시던 그 모습이었다. 그렇게 불편하신 몸으로도 찾아온 교도들을 맞아 법과 흥을 함께 나누시던 대산종사의 모습은 한 마디로 '낮은 곳에 임한 할아버지 성자'셨다. 필자의 뇌리에 남은 대산종사의 이미지는 필자의 신앙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좋은 지침이 되어 아무리 심각한 일이라도 즐기면서 임하는 자세를 가지게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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