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생의세 대법풍 불려

동정간 삼학병진으로 삼대력을 갖춰 대법풍을 불리며 일원대도를 전한 수도인. 70여년을 일관한 신성으로 스승의 경륜 실현에 정성을 다한 훈타원 양도신(薰陀圓 梁道信, 1918~ 2005) 종사.

그는 부산 사람으로 부친 래산 양원국은 불연이 깊고 신심이 깊어서 청정한 계행으로 수년간 불교수행을 해 주위에서는 '양처사'라 불렀다. 그러나 계행이 문란한 승려들을 보고 재가수도를 결심하고 천수경 10만독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 공덕인지 천수경 10만 독이 끝나갈 무렵인 원기14년에 이타원 장적조대봉도를 만나 불법연구회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생불을 만나고 싶은 생각에 불법연구회를 방문해 대종사를 친견하고 3개월 동선에 참여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집안 식구들에게 "천수경 10만독을 한 공덕으로 정법회상을 만났고, 생불이신 대종사를 만났다"고 환희용약하며 지극한 신성으로 대종사를 받들며 부산지역 교화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런 약조 깊은 인연으로 그가 14세 되던 원기16년에 부산을 방문한 대종사를 처음으로 뵈었다. 사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장래를 계획할 무렵인 원기17년에 삼산 김기천종사가 하단지부교무로 부임했다. 삼산종사의 지도로 전무출신의 꿈을 키우며, 대종사께 상서와 하서를 주고 받으며 서원을 굳혀갔다. 숙고 끝에 부친에게 전무출신 서원의 뜻을 밝히자 부친은 두 가지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

'중도에 변심이 되면 죽으면 죽었지 집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한다는 것과 세상에 마음이 끌리지 않을 만한 공부의 실력을 얻기 전에는 집에 오지 말라'는 조건이었다. 대종사는 원기20년 하단과 남부민에 이어 초량지부를 세울 목적으로 부산을 방문했다. 그는 일을 마치고 불법연구회로 돌아가는 대종사를 따라 출가를 단행했다.

불법연구회공양원으로 근무한 후 원기23년에 통신부 서기로 근무했다. 이때 대종사와 문답한 내용이 〈대종경〉 수행품17장에 실린 일심공부에 대한 내용이다. 이처럼 대종사를 모시고 살면서 구전심수로 실력을 갖췄다.

원기26년, 대종사는 "남원지부 교무로 가라"고 하명했다. 대종사는 "동정간에 공부심을 놓지 말 것, 남자를 조심할 것, 공물과 사물의 한계를 분명히 할 것, 교도와 두루 화할 것"등을 당부했다. 이 말씀을 받들어 22년을 봉직하며 법당 신축, 방송교화 실시, 연원교당 개척, 인재양성 등으로 지역사회에 원불교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했다.

이런 중에도 속 깊은 마음공부로 큰 힘을 얻어 우주와 합일하는 대정에 드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원기48년에 고향인 부산으로 일터를 옮겼다. 남원에서 다진 교화력으로 일반·청년·학생·대학생 등 청소년교화와 방송을 통한 사회교화에 주력하여 부산지역 교화에 새 바람을 불어 넣었다.

원기56년 54세의 원숙기에 종로교당에 부임했다. 6년을 봉직하며 법당 신축 및 연원교당 설립, 교리강좌와 사상강연회 실시 등을 통해 교당교화의 마지막을 찬란하게 장식했다. 원기63년, 동산선원원장으로 부임해서는 10년을 인농의 책임을 맡아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는 퇴임하는 그날까지 대종사를 주세불로 모시고, 정산·대산종사와 좌산상사에 이르도록 생사고락과 천신만고를 함께하며 한 맘으로 일관했다. 원기73년 퇴임 후에는 태허공(太虛空)과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벗 삼아 수양에 정진하다 열반상을 나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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