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중·고 발전의 초석

유년시절 "금강실행단이 되라"할 정도로 대종사의 사랑을 받으며, 전무출신 가정에서 성장한 촉망받은 인재. 늦깎이 출가로 교립학교 발전에 헌신하고, 근검절약과 검박한 생활로 모은 정재를 교단불사에 합력해 법훈 공적을 쌓은 월산 송정호(月山 宋正鎬, 1931~2013) 대봉도.

그는 일찍이 대종사를 친견하고 주세회상에 귀의한 할머니 영타원 이대교선진의 연원으로 원기 16년에 입교했다. 이런 약조 깊은 우리회상과의 만남은 아버지 직산 송봉환교무가 전무출신의 길을 가게 해 교단 창립에 헌신했으며, 또한 어머니 명타원 민성경종사는 대종사의 법하에서 5년간을 동·하선을 날 수 있었다. 부친이 출가하여 마령·좌포교당 등에서 근무할 때는 대종사의 하명으로 그의 모친은 교당 감원 역할을 하며 교단의 공사에 동참했다.

이런 가정 분위기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전무출신의 꿈을 갖게 했다. 그러나 부친이 41세란 아까운 나이에 열반을 하자 6남매 중 장남인 그는 어머니를 도와 가정사를 책임져야만 했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은 출가의 꿈을 미루게 했다. 그 대신 출가한 명호·인호·경호 등 세 여동생의 뒷바라지를 한 후, 50이란 나이에 늦깎이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그는 출가 후 원광고등학교, 원광중학교, 원광중앙신협 등에서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헌신의 삶을 살았다. 특히 출가 전부터 맡았던 익산교당 교도회장 직을 출가 후에도 수행하며 23년을 교당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는 26세에 교립 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40여년을 초창기 어려운 학교여건을 헤쳐 나가며 원불교 정신에 입각한 2세 양성과 학교발전에 공헌했다. 특히 무한한 잠재력과 희망의 대상인 학생들과 살아 온 것을 일생의 보람으로 여겼다.

원광고등학교 2부 교감으로 재직시에는 박봉을 나누어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이 배움의 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남모르게 자비의 손길을 주었다. 원광중학교로 자리를 옮기자 학생들이 찾아와 '선생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며 울음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원광중학교 근무시엔 잠재된 개개인의 재능을 개발하고 자아실현을 구현하기 위해 열린 교육을 지향했다. 학생들의 창의력이 신장되고 함께 즐거운 학교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러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전북 지역 최초로 '토요일 책가방 없는 전일제 클럽활동'은 교육계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예능발표회와 교실교재의 현대화를 통해 특기와 소질을 개발하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었다. 이런 일생의 공적을 인정받아 퇴임시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는 순일하고 정성스러우며 송죽 같은 성품의 소유자로 정평이나 학교를 퇴임 후에는 원광중앙신협 이사장을 수행했다.

그는 평소에 "우리 교단 안에서 근무하며 받은 것은 식구들이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비용을 제외하고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런 소신은 정재를 아낌없이 장학사업에 내놓았고,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가 발족되자 1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희사해 공인으로서 참 모습을 보여줬다.

퇴임 후에는 '심월독로 중정만대(心月獨露 中正萬代)'란 공부표준으로 정진 적공하며 생사거래에 걸림이 없는 내생 길을 준비하고 떠났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