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선 교도/서면교당
원기56년 가을 먼저 입교한 친구 박두학, 설상일, 배상호 등과 함께 서면교당 학생회를 다녔다. 청년회원이 되어 전국청년연합회 훈련을 총부에서 마치고, 요양 중이시던 서면교당 박세경 교무를 만나러 이재명, 김대룡 등 선배들과 함께 신도안으로 갔다. 그 곳에서 박 교무의 안내로 대산종사를 처음 뵙고 황송한 느낌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대산종사의 얼굴에는 밝은 광채와 맑고 깊은 눈매, 고요하고 자애로운 느낌을 받게 됐다.

제대 후 복학하여 청년회와 대학생회의 선배로서 신도형 교무의 '교전공부'를 참고하여 교리연마를 하면서 기원문을 작성하고 매일 저녁 향을 피우며 정진을 했다. '경전법규 연마하기를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 연마하기를 주의하라'는 조항에 따라 의두를 품으려 했으나, 뚜렷하게 걸리는 의심이 없어 고민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기도식 말미에 읽는 청정주의 '법신청정본무애' 귀절에서 깊게 걸리어 몰아의 시간이 점차 길어지게 되었고, 반딧불 같은 작은 지혜도 생겨났다. 기도정진을 시작한지 1년을 지나니 대산종사를 뵙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 원기67년 1월12일 혼자 배낭을 꾸려 신도안으로 갔다.

아침에 부산을 떠나 신도안 삼동원에 도착하니 저녁 공양시간이 지나 대산종사께서 눈 쌓인 구내를 산책중이었다. 인사를 올리고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숙소를 배정받아 강문성, 최진광 외 70여명의 교우들과 13일간 신도안에서 공부하며 큰 은혜를 입었다.

특히 감상담 발표 후 삼밭재에서 자생하는 돌복숭아씨 염주를 준 일, 동학사 주차장 부근의 야외법회에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한 일, 토굴가를 부르고 나니 마스크를 벗으며 "대선이, 그 노래 많이 부르면 네 뜻 이룬다"고 수기해 준 일은 영생도록 기억하려 한다.

그때 이후 방학 때, 서울의 직장 생활 중 주말과 연휴 때, 휴가 때마다 대산종사가 주재하는 신도안 삼동원, 원평교당, 구릿골, 소남훈련원, 벌곡삼동원 등으로 뵈러 다녔다.

신혼여행을 벌곡삼동원으로 갔더니 삼동원 건물에서 좀 떨어진 오두막에 대산종사가 낮에 쉬는 방과 쓰던 이부자리를 내어준 일, 정도리 바닷가에서 곁에서 수영을 하고 따뜻한 몽돌로 마사지해 준 일, 동용추 계곡과 소남훈련원 계곡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함께 하던 일, 정도리 바닷가에서 30분 넘게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일원상 몽돌을 주워서 준 일, 소남훈련원에서 만불전의 돌 놓는 일과 구릿골에서 돌축대를 쌓던 일, 영모묘원의 임야가 매물로 나왔다는 보고를 이성국 교무에게 받은 후 답사를 위해 왕궁으로 올 때, 완도에서부터 봉고차의 옆자리에 앉아서 왕궁까지 왔고 '땅이 어떠냐'고 물어준 일, 하와이국제훈련원에서 옆자리에 앉아 함께 주변지역 드라이브를 한 일, 영묘원의 숙소에서 손 마시지해 준 일 등등, 그때 그때 수많은 법문을 받드는 헤아리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다.

특히 소남훈련원 오두막의 작은 마루에 앉아 각 지방의 교무들이 교당 현안을 보고하면 잘 들은 후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감고 묵념을 하며 기운 밀어주던 모습은 천하를 내 집 삼은 대 사업가였고, 많은 교무들의 세세곡절을 모두 들어주는 모습은 마음을 허공과 합하는 대 도인이었다.

영생토록 기억하고픈 법문은 "부처님 눈을 본 사람이 있느냐? 너희에게는 너희 부모님 눈이 바로 부처님 눈이다. 세 명을 자식 보듯 바라보면 세 명의 부처이고 만 명을 그런 눈으로 보면 만 명의 부처다"고 사자후를 울렸다. 부처되는 표준을 이처럼 쉽게 간명하게 밝혀주시다니!

원기60년 서면로타리의 청학서점에서 신심명의 첫 구절인 '지도무난 유염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를 읽다가 온 몸에 전율을 느꼈었는데, 대산종사의 '부처님 눈' 법문은 '참으로 큰 부처님이시다'라는 굳은 확신을 갖게 했고, 영생의 공부표준으로 가슴에 새기게 됐다.

대산종사께서 '만 생령을 자식 삼는 부처가 되라' 한 법문은 지금도 많은 추억들과 함께 서원의 등불되어 비춰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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