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의 첫 제자

12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으로 모신 예지와 심법의 소유자. 대종사의 구도기에 알뜰한 후원인으로, 대각 후에는 첫 제자가 되어 정신·육신·물질을 온통 바쳐 교단 창립을 위해 무아봉공으로 일관한 팔산 김광선(八山 金光旋,1879~1939)대봉도.

그는 천성이 근실 강직하여 한번 하기로 한 일은 결단코 해내는 용단력이 뛰어났다. 10세에 한문사숙에서 수학했으며, 성장해서는 가계를 돕기 위해 작농을 하기도 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상업을 하기도 했다. 대종사와 동향인 그는 마치 대종사의 대각과 중생제도를 돕기로 약속이나 한 듯 대종사의 구도기에 의형제를 맺고, 적극적인 후원자가 됐다. 특히 고창 연화봉에서 구도할 때 구도지 물색 등을 도우며 구도생활의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에 대종사가 오랜 구도 끝에 일원대도를 대각했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서 광명이 일월 같고 원만해진 형모(形貌)를 접하고, 호형호제하던 일을 즉시 고쳐서 대종사를 스승으로 받들기로 작정하고 첫 제자가 됐다. 당시 유교 문화를 익힌 선비로서 12살 연하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심법은 그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일이다. 그는 이때 바친 신심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원기2년에 대종사는 수많은 문장과 가사를 읊어 그에게 기록하게 하고 이를 〈법의대전〉이라 명명 했다. 그러나 대종사는 후일에 일시적 발심을 도울 수는 있으나 정식교서로는 될 수 없을 것이라며 소각하게 했다. 원기2년 7월 구성된 남자정수위단 구성에서 태방단원에 입단 됐다. 단원들과 함께 금주금연, 근검저축 등으로 저축조합운동에 합력했다.

원기3년 방언공사가 시작됐다. 단원 중 가정형편이 넉넉하고 으뜸가는 기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정신·육신·물질의 삼방면에서 솔선수범했다. 특히 방언작답 후 제방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 몸으로 제방을 사수한 일화는 공심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말해준다. 원기4년에는 '내 한 몸 던져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신념으로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이뤄냈다.

원기9년 익산총부 건설 당시 동지들과 함께 엿 장사 등을 하며 물질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후 총부 농업부원, 총부감원, 영산 서무부장 등으로 봉직했다.

원기17년 54세에 첫 교화지인 마령교당 교무에 임명됐다. 주경야독으로 교리훈련을 시킴과 동시에 전답을 개간하여 수박재배와 과수원 운영 등을 통해 교당유지의 토대를 세웠다. 또한 원평교당에서는 교당건축 등을 하며 교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원기22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총부로 돌아와 치료에 전념했다. 이때 〈회보〉에 '학이불능(學而不能)'이란 글을 실었다. 이는 〈대종경〉실시품 47장에 실렸는데 '순일무사 하신 공심' '일관 하신 성의' '위대한 포용력'등으로 요약하여 대종사의 능함을 찬양해 학인들에게 일깨움을 심어줬다.

원기23년 순교무로 각지를 순회하며 교화에 전력하던 중 병이 재발해 원기24년 6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대종사는 열반의 비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대종경〉 천도품28장에 수록된 '생사거래와 업보멸도'에 대한 법문으로 위로했다. 대종사 구도의 후원인, 대종사의 첫 제자, 무아봉공의 화신, 이사병행 영육쌍전의 사표로 교단사에 길이 빛날 창업 공덕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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