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노란 배가 된다구요?' 농촌을 찾은 도시 아이들

시대적 아픔을 잊지 않고 또 다시 희망의 씨앗을 키워내는 일을 우리는 멈출 수 없다. 희망을 담고, 꿈을 꾸며, 정직하게 소신껏 자기 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담아내며 우리가 살아갈 세상의 희망 씨앗을 다시 틔워본다.
▲ 천지보은공동체에서 배솎기 작업을 끝낸 청소년들.

민간인통제구역에 다다른 청소년들은 사뭇 긴장돼보였다. 군인들이 다가와 어른들의 신분증과 학생들의 정보를 받아갔다. "정말 이 안에 논과 밭이 있어요?" 아이들의 질문에 "아마 있겠지?"라고 응수하는 활동가들. 차량은 초소를 지나 통일대교를 건너고도 한참을 달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서오세요, 여기는 천지보은공동체 농장입니다." 어리둥절한 청소년들을 반기는 파주교당 김상기(법명 덕근) 천지보은공동체 대표, 그는 자신을 '농부아저씨'라고 불러달라며 환한 웃음을 건넨다. 열네명의 청소년들과 네명의 활동가들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며 시원한 물을 마셨다.

5월24일 오전10시, 파주 민간인통제구역까지 찾아온 이들은 한살림 고양파주생활협동조합의 청소년들. 봉사를 겸한 농촌체험활동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다.

한살림 농촌체험활동 10개월 대장정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친구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청소년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그 어느 세대보다 짙다. 청소년들의 상실감과 혼돈에 어른들은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지니고 있으며 또 지녀야 한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청소년이며, 우리보다 더 나은 어른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축소 혹은 취소된 가운데, 학교나 청소년 관련 행사는 더욱 위축됐다. 침묵의 봄을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찾아온 선물같은 시간, 흙과 바람, 햇빛이 주는 은혜를 아는 천지보은의 시간이 펼쳐졌다. 도시 아이들에게는 다소 낯선 농촌활동은 4월 오리엔테이션부터 내년 2월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지는 10개월 대장정이다. 이날은 두번째 시간으로, 천지보은공동체의 농장에서 가을에 수확할 배나무와 처음 만났다.

한살림의 생산자로 청소년들과 인연을 맺은 김 대표는 먼저 천지보은공동체를 소개했다. 배와 감자, 콩, 당근을 심어 한살림에 내놓는 그는 대부분 조합원의 자녀인 청소년들에게 "아저씨 이름을 찾아 사먹어주면 좋겠다"는 농담을 건넸다.

"오늘 여러분들이 만날 배나무도 아저씨는 심어놓기만 했지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가끔 솎아주기나 하면 되지, 모든 것은 하늘과 햇살, 땅, 바람과 비가 해줘요. 그런 은혜가 바로 천지은입니다. 이 천지에 감사하며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는 의미로 천지보은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인거예요."

차소리 기계소리 하나 없는 농장에서 청소년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간간히 미풍이 불어 큰 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농부아저씨'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갑자기 다람쥐가 나타나고 강아지가 지나갔으며 이름모를 벌레가 평상에 올라와 '꺅꺅'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김 대표는 민간인통제구역의 개념과 농사를 지어온 14년 세월을 이야기하며 국토 분단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다.

TV도 컴퓨터도 없는 시골, 스마트폰에서 해방된 아이들
흙·바람·햇빛이 주는 천지보은의 시간 체험


땅과 하늘, 햇살, 바람, 비의 은혜

"아마 많은 것들이 신기할 테지만 특히 두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는 거예요. 이 곳에서 나온 농산물들이 맛있는 건, 사람이 먹어도 안전하고 좋은 물을 과일과 야채들이 먹어서 그래요. 또 하나 화장실이 친환경이에요. 혹시 큰 일을 보고나면 옆에 있는 흙을 덮어주세요. 그래야 거름이 되어 밭에 뿌려집니다."

작업을 위해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창고의 가위를 들은 청소년들은 밭으로 향했다. 오늘 할 작업은 솎아내기. 한 꽃눈에서 나온 꼬마 열매들 중 예쁘고 튼실한 것 한두개만 남기고 잘라내는 것이다. 작고 둥글고 딱딱한 이 정체모를 열매가 커서 노랗고 달콤한 배가 된다니, 못미더운 아이들은 그 떫은 열매를 깨물어 맛을 보고 후회하기도 했다.

도시 청소년들의 체험활동이지만 제법 사다리도 등장하고 솎아낸 열매 봉지도 두둑해졌다. 드디어 점심시간, 각자가 반찬 한가지와 식기를 가져와서 함께 나눠먹었다. 천지보은공동체의 안주인 정미옥(법명 연은) 아주머니가 인근에서 난 재료로 쌀밥과 김치찌개를 내왔다. 논밭일 후에 먹는 꿀같은 밥맛을 처음 본 청소년들은 서로의 반찬을 뷔페삼아 "완전 맛있어"를 연발하며 수저를 놀렸다.

▲ 배를 솎아내고 있는 서효림 학생.
놀이를 찾아내는 아이들

TV도 컴퓨터도 없는 시골, 스마트폰에서도 해방된 아이들은 처음엔 우물쭈물 하다 이내 놀이를 찾아냈다. 배열매 저글링, 사다리 빨리 타기, 개구리 잡기 등등 아이들의 놀이 본능은 시골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장독대 옆에서 돌을 표적에 맞추는 위험천만한 놀이를 활동가들은 조바심으로 관전하기도 했다.

오마중학교 1학년 서효인 학생은 "엄마가 가라고 해서 왔어요"라고 하면서도 "다른 활동들은 솔직히 그냥 보고 오는 게 다인데, 여기 와보니 직접 장갑도 끼고 솎아내기도 해서 신기해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10월에 배를 수확하면 엄마아빠한테도 나눠줄거예요"라며 효녀의 모습을 보이기도….

처음 농촌행인데도 제법 야무지게 일을 해낸 대아중학교 2학년 민정아 학생은 "두시간여는 할만 하지만 조금 더 하면 내일 팔을 못 쓸 것 같다"며 내내 하늘로 향했던 어깨를 주물렀다.

오후 활동까지 마친 아이들은 감상을 나눈 뒤 각자 시간을 보냈다. 나뭇잎이나 돌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기도 하고, 효소로 담글 수 있는 솎아낸 배를 담아가기도 했다.

값진 땀을 깨끗한 물로 씻어낸 개운한 기분, 이제는 점점 없어져가는 자연과의 만남이 아이들에게 아로 새겨졌다. 조용한 계절 속에 움튼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 속에는 흙과 자연의 가치, 우리가 지켜가야 할 것들의 소중함이 함께 자랄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