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교무 1호, 초창교화 개척자

여자교무1호로 초창교당을 일구며 창립의 법연을 주인으로 키운 교화개척자. 교단경리 문서의 체계를 세워 일제시대의 고비를 넘기게 하고, 일원문화 개척의 선구적 역할을 하며 만대 사표가 될 일생을 살다간 융타원 김영신(融陀圓 金永信, 1908~1984) 대봉도.

그는 천성이 활발하고 명랑하여 쾌활한 웃음은 모든 이의 근심을 녹여 주는 듯 했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성여자고보를 졸업한 그는 학업성적은 물론 운동 등 다방면에서 재능이 있었다.

서울 소재 8개교의 연합운동회에서 육상선수로 출전했다. 그러나 경기도중 실족으로 중상을 입었다. 병상의 위경 속에서 인생에 대한 깊은 번민의 시기에 불교를 만나 독실한 신자가 됐다.

원기9년 10월에 "전라도에서 생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친 이성각, 이모 이공주, 외조모 민자연화 선진 등과 함께 소태산대종사를 친견하고 제자가 됐다.

여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교당 교무 송도성종사의 지도로 원기12년에 전무출신의 뜻을 굳혔다. 이때 상경한 대종사께서는 1대 1회 문서정리를 위해 경성부기학원에서 공부하게 했다.

원기13년 봄, "본관에서 결산을 도우라"는 대종사의 명에 따라 출가를 단행했다. 서무부 서기로 근무하면서 1회 12년간의 결산 사무에 조력했다. 원기14년 경성지부 서기와 순교로 근무하다 총부로 돌아왔다. 원기17년 9월에 발간된 월보40호에 '선후본말을 알라'를 게재했다. 이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 〈대종경〉교의품 28장의 내용이다.

원기19년 27살 되던 해에 부산 남부민출장소 교무로 부임했다. 정녀로서는 최초의 교무 발령이었다. 이때 대종사께서는 "영신이가 여성교무의 시발이니 만세를 불러주자"하여 대중이 만세를 합창했다. 다시 초량교당으로 전보되어 교당 신축을 하고 부산 일대 교화의 기초를 다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오직 일원대도 정법을 전하여 선도로 인도하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비방과 조소는 견디기 힘들었다. 세존이 "만약 포악한 사람들이 교화를 방해하고 너를 죽이면 어찌하겠느냐" "보기흉한 몸뚱이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니 감사하다 하겠습니다"는 불경에 나오는 부루나존자의 일화를 읽고 천신만고를 당할지라도 감내하겠다는 용맹심으로 교화를 했다.

원기23년 신병 치료차 경성에 머물다 개성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원기26년 다시 총부로 돌아와 공익·육영부장을 하며 주변의 청소년들을 모아 야학을 하고, 박창기 대봉도를 도와 '자공회(子供會)'라는 유년회를 조직해 지도했다.

이후 원평·신태인교당에서 근무하며 6·25를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활발한 교화활동을 펼쳤다. 이때 수위단원에 피선되어 교단사에 기여했다. 원기38년 제1대 성업봉찬대회에서 정녀들에게 수여하는 연화장을 조전권종사와 함께 받았다. 이어 교화부장, 동래교당 교무, 총부 순교감, 원광사 사장, 의정부교당 교무 등을 거쳐 원기56년 중앙수양원 교감으로 일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신학문을 익힌 신여성으로서 교단의 문화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어 〈월말통신〉 〈회보〉 〈원광〉등 기관지에 40여 편의 글을 발표하는 열정을 보였다.

원기63년부터 교령업무를 수행하다 원기68년 수도원에 입원해 수양에 전력하며 청풍명월 같은 생을 추구하다 열반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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