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희원 교도 / 강남교당
(논설위원)

교화단은 우리 원불교 교도에게는 무척 익숙한 것이다. 연초에 교당에 가면 의례 교화단 편성이 되어있다. 모두들 관심 있게 올 한해 나와 함께할 단장과 중앙, 그리고 단원들의 이름을 확인하며, 다정한 사람과 같은 단이 되면 서로 기뻐도 하고, 아직 서먹한 단원이 있으면 어떻게 친해질까 학기 초에 새 반을 배정 받은 학생처럼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왜 대종사께서 교화단을 조직하라고 하셨을까? 혹시 우리가 너무 익숙한 나머지 교화단의 진정한 활용법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교화단은 훈련이다. 대산종사의 법문을 보면 '교화단'은 항상 '훈련'이라는 말과 함께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스승님께서 교화단을 생각할 때는 훈련을 함께 생각했다는 것이고, 이는 교화단은 훈련을 위한 조직이라는 교화단의 본질적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해 주는 부분이다. 교도수가 늘어나서 모든 교도가 교당에서 교무로부터 개인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법을 공부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고민의 결과가 교화단이라는 원불교만의 독창적인 조직으로 나타난 것이다. 조직이 본질적인 존재의 이유를 잊으면 아무리 다른 장점들이 많아도 그 조직의 생명력은 약해지게 되어있다. 따라서 교화단은 교법의 훈련조직이라는 본질을 구성원들이 분명히 인식할 때만 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고, 설사 단원끼리 갈등도 유연하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교화단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단원들이 처음부터 이런 본질적인 고민을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직이 본질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신념과 지속적인 공유이다. 즉 단장이 우리 교화단은 교법의 훈련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것을 단원들과 꾸준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조직이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잊으면
아무리 다른 장점이 많아도 생명력을 잃게 된다


교화단은 사랑이다.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분명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었지만 그런 본질적인 이유만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도 즐겁고 새로운 하루하루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선생님과 내가 일대일로 과외를 했다면 공부는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을지라도,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초·중·고 12년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교화단은 교도들이 정을 느끼고 동지애를 체험하여 교법 훈련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고, 공부에 퇴굴심이 날 때도 단원들의 동지애로 극복해 갈 수 있는 우리 공부의 안전망 같은 것이다.

교화단은 조직이다. 교단과 교당의 소식을 신문과 회보를 통해서는 내 일로 다가오지 않다가도 단장에게 들으면 내 일로 인식되는 경험은 누구나 했을 것이다. 우리 교단과 교당의 방향성과 중점 사업을 단장이 단원에게 전달하고, 단원들의 소중한 의견을 교단과 교무님께 전달하는 역학을 충실히 하여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당, 창의적인 교당을 만드는 우리 교단의 혈관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교화단은 교화이다. 새로운 교도를 모셔왔을 때, 좋은 단장이 있는 단으로 배정되면 한 시름 놓았다는 기분이 든다. 교화는 교화단을 통하여 이루어 졌을 때, 가장 확실하고 건강하고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살펴 본 교화단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장과 중앙이다. 특히 단장이다. 또한 모든 교도들은 내가 단장의 역량을 갖추어 새로운 9인의 단원을 이끌어 보겠다는 목표를 마음 속에 새겨야 한다.

이 사회의 어떤 조직이든지 교화단 정신과 운영 원리를 이용하면 최고의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내가 속한 모든 조직을 교화단 키우는 마음으로 운영해 간다면 낙원세계 건설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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