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원 교무/총부사업기관원창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생사를 오간 적이 있다. 다행히 주위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경험했다. 세월호 희생자들도 그 차가운 물속에서 사방이 막혀 빠져 나갈 곳도 없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파온다. 일을 하다가도 눈에서 눈물이 그냥 흐르고 가슴이 먹먹하다.

지금 언론에서는 유병언 일가를 잡고 선장과 선원들을 살인죄로 처벌하겠다고 한다. 초기 대응에 미숙했던 해경들의 죄과를 묻고 해양경찰을 없애겠다고 한다. 법은 밖으로 드러난 사건들의 원인을 찾아 해당 기관과 사람들을 처벌한다. 이 때 원불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과 각자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소태산대종사는 〈정전〉 솔성요론 9조에 "무슨 일이든지 잘못된 일이 있고 보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를 살필 것이요"라 했다.

법으로는 얼마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지만
과연 내 양심으로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나는 내 자신에게 3가지 물음을 던지며 참회한다. 하나는 '나는 도덕적 해이가 없는가' 이다. 죽을 줄 알면서도 나만 살겠다고 도망쳐 나온 선장과 선원들, 그들의 도덕적 해이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이가 들고 특히 지위가 올라 갈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 질 때 법에는 어긋나지 않지만 내 욕심만을 차린 일이라든지, 지위와 힘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든지, 더 할 수 있음에도 불고하고 적당한 선에서 일을 멈추는 등 비록 작지만 부끄러운 일들이 있었다.

둘은 '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이다. 지난 2012년 1월 이탈리아 유람선 코스타 콩코디아호도 세월호와 비슷하게 침몰했다. 당시 이탈리아 검찰은 선장 셰티노에게 승객 300여 명을 버리고 탈출, 32명을 사망케 해 구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2697년형을 구형한 바가 있다. 선장은 승객을 다 구하고 마지막에 탈출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나 자신도 내가 처한 곳에서 교무, 기관장, 부모, 자녀, 대종사의 제자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법으로는 얼마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지만 과연 내 양심으로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셋은 '나는 평소 준비공부를 잘하고 있는가'이다. 귀중한 황금 시간이라고 불려지는 6시간 동안 두 손 놓고 있었던 해경과 구조대들, 사건 초기 정부나 해경이나 구조팀들은 우왕좌왕 하다 그 중요한 시간을 다 놓쳐버렸다. 평소 준비가 잘 돼있고 훈련됐다면 이번과 같은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 때 교역자광장 게시판에 '교단에 인재가 없다'고 몇 번이고 글을 올렸다. 교단의 어려운 일을 슬기롭게 해결할 곳곳에 전문가가 없어서 난제를 풀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인재를 기르지 못한 교단 행정부나 어른들을 질타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소태산대종사는 그 어려운 시기, 홀로 의심하고 홀로 고행하며 스승 없이 대각을 이루고 이 같은 큰 회상을 건설했는데 나는 주위에 스승은 물론 동지들이 가득한데도 '그럼 너는 인재가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스스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대종사가 다 밝혀 놓고 선진들이 일궈놓은 터전에서도 인재가 되지 못했는데 누구를 탓하느냐'는 내 안의 양심 소리를 듣게 됐다. 평소 준비공부가 게으른 탓이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법으로만 다스리고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나도 훗날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나만 참회 반성하고 법으로 엄중하게 묻지 않으면 국가 사회의 안녕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이 세가지는 원불교 교도는 물론 국민 모두가 해야 할 자세이며 그것이 소태산대종사의 정신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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