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교화 주춧돌, 의료활동

교단에 대한 투철한 신성과 부단한 공부심으로 교법을 실천한 활불. 구전심수의 스승인 대산종사의 뜻에 순명하며 의사교무로서 이국땅에서 일원의 법 종자를 뿌리고자 공도에 헌신한 신산 김양수(信山 金亮秀,1940~2013) 종사.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신심이 굳은 어머니의 연원으로 원기41년 초량교당에서 입교했다. 대학교에 들어간 그는 교법이 좋아서 아침이면 좌선과 기도를 하며 법대로 살아 가려는 노력을 했다. 대학 2학년 때 대구교당에서 대산종사를 처음으로 만났다. 마치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온 듯 했다. 그 순간 '내 일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후로 방학이 되면 대산종사를 모시며 구전심수로 교법을 체득해 갔다. 이러던 중 대산종사는 공대를 마치면 의대에 갈 것을 당부했다. 그는 대산종사가 "개똥을 줍고, 화장실 청소를 하라"해도 두 맘 없이 받들며 스승과 둘 아닌 마음으로 일관하며 실천 적공의 생활을 했다.

원기47년 홍타원 박은섭 대봉도의 추천과 보증으로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을 마친 그는 원기56년 동화병원에서 전무출신으로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대산종사는 종법사위에 오르기 전부터 해외교화에 관심을 가졌었다. 원기47년 종법사위에 올라 대종사의 일원대도와 정산종사의 삼동윤리에 바탕해 결복 교운을 열어갈 국내외 교화방안을 모색했다. 특히 해외교화 기반 조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대산종사의 뜻에 따라 원기57년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떠났다.

대산종사는 "미국에 가면 원불교 간판부터 걸라"했다. 이를 실행에 옮겨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도 유지비와 관리비 마련을 위해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무아봉공의 일념으로 살았다. 이렇게 시카고교당을 창립하고 22년을 교도회장 직을 수행하며 교당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대산종사를 공부와 삶의 표준이자 의지처로 삼고 살았다. 낯선 미국에서 개척교화를 하며 의료인 교무로 산 것도 대산종사의 뜻에 따른 삶이었다. 그는 교당과 병원을 둘로 보지 않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교화를 개척하는 후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줬다. 또한 회의나 공사 등에서는 늘 겸양의 자세로 대의와 중도를 잡고 화합과 소통을 했다. 이런 취사력은 교도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또한 의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수요공부방'을 이끌며 〈정전〉〈대종경〉등을 공부하며 교도들의 신앙 수행의 길잡이가 되어 정진 적공에 공을 들였다.

30여년을 의사로 봉직하면서 흑인과 빈민, 무보험자인 교무들의 건강을 지키는데 헌신하며 든든한 후원자로 살았다. 특히 의술과 인품이 뛰어나 미국 내 '베스트가정의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산종사 열반시에는 의사로서 정성을 다하지 못해 불효를 했다는 생각으로 자책하는 효성스런 제자였다. 건강이 악화돼 의사의 역할을 그만두게 되자 자신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챙기며, 교리공부를 지도하며 교도들의 법위향상에 큰 힘이 됐다.

교단의 한 선진은 그의 일생을 '불석신명(不惜身命)불공, 금욕난행(禁慾難行)불공, 희사만행(喜捨萬行)불공'을 한 생애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산종사가 해외교화의 바둑 돌을 놓을 때 기본 포석이 된 결복 교운을 열어갈 의미 있는 삶을 살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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