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관응 교무/신현교당(논설위원)

아침 향내를 전달받기 위해 들길을 걸어 본다. 물기 머금은 꽃잎들을 바라보며 그냥 걷는다. 사각사각 스치는 풀잎들의 정겨움을 들으면 걷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또 다시 걷다보면 자연은 모양으로 소리로 청명한 에너지를 전달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풀과 꽃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그 에너지의 파동을 즐기면 된다. 그러면 어느 것은 좋고 어느 것은 필요 없다는 관념을 내려놓게 된다.

〈장자〉 내편 제물론에 있는 나비의 꿈 이야기인 '호접몽'을 읽다보면 기운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의 이야기는 실로 그럴듯하지만 너무나 크고 황당하여 현실세계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장자가 말하기를, "너는 쓸모있음과 없음을 구분하는구나. 그러면 네가 서있는 땅을 한번 내려다보아라. 너에게 쓸모 있는 땅은 지금 네 발이 딛고 서 있는 발바닥 크기만큼의 땅이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땅은 너에게 쓸모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딛고 선 그 부분을 뺀 나머지 땅을 없애버린다면 과연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작은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겠느냐?"

제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자 장자는 힘주어 말했다.

"너에게 정말 필요한 땅은 네가 디디고 있는 그 땅이 아니라 너를 떠받쳐주고 있는, 바로 네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머지 부분이다."

이처럼 그동안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풀과 들꽃도 마찬가지다. 필요 있다고 여긴다면 자연스러움을 포용하게 된다. 자연의 도움을 제대로 받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고리의 중요성을 알아차리면 충만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산, 물, 사람, 미물곤충이 전해주는 도움의 기운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관심있는 분야에 몰입하다 보면
삼라만상이 알아듣게 가르침을 줘


대종경 변의품 3장에서는 '한 사람의 기운과 형체가 그 동·정을 서로 같이 하는 것 같나니, 하늘의 기운과 땅의 바탕이 서로 연하여 끊임없이 순환함으로써 조화를 이루나니라. 그러나, 주와 종으로 논하자면 기운은 주가 되고 바탕은 종이 되어 기운이 행함에 바탕이 따르게 되나니 이것이 곧 만고에 바꾸지 못할 원리'라고 밝히고 있다.

며칠전에 거제 서당골 근처 임도에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날씨도 청명하고 하여 점심공양을 마친 후 서당골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난후 잘 닦여진 임도를 걷는데 가는 길목마다 나비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걸으며 주위를 맴도는 것을 발견했다.

나비들은 조금 있다 꽃 위에 앉아 쉬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하도 신기하여 가만 그 자리에 서 있다 보니 나비의 움직임 따라 팔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챘다.

나비의 움직임에 몰입하다 보니 그 움직임대로 몸이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파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움직임을 따라 하다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여기서 느낀 것은 자신의 관심있는 분야에 몰입하다 보면 삼라만상은 찬찬히, 알아듣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찰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 걸어 다니고, 앉고 눕고, 차 마시고, 밥을 먹고, 문답하고, 일하는 동안에도 깨어있으면 내 주인공을 찾는 날도 그렇게 먼 시간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꾸준히 하다 보면 해결될 날이 있다.

이것은 대산 종사의 '채약송(採藥頌)' 한귀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때때로 허공 법계의 바른 기운을 머금어 기르고, 산하대지의 정령을 삼켜 늙어감을 알지 못하나니, 나한의 신통한 눈으로 엿보아도 알지 못하나, 나와 너만 알 뿐 사람들은 알지 못하더라. 하하하하."

유월의 바쁜 움직임 속에서도 호흡의 길이가 달라지고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찾는 공부인들이 톡톡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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