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으리(의리)!', '전통의 맛이 담긴 항아으리(항아리)!', '신토부으리(신토불이)!' 배우 김보성의 진지함이 더 웃기는 '으~리', 과연 우리 사회는 이 '으리' 신드롬의 한 복판이다. 식혜CF 뿐 아니다. 온갖 매체에서 '아메으리카노(아메리카노)', '독도는 으리(우리)땅', '레으리잇 고(렛잇고)', '모나으리자(모나리자)' 등의 '패러으디(패러디)'가 쏟아진다.

신조어나 유행의 배경에는 그 사회와 문화의 맨얼굴이 담겨있다. 많은 평론가들이 으리신드롬의 이유를 '지금 우리에게 진짜 의리가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침몰하는 배를 버린 선장, 위험천만한 작업 현장을 외면하는 수뇌부, 같은 지역이라고 무조건 감싸는 지방선거후보와 유권자, 끼리끼리 봐주는 관료 마피아, 핵 마피아 등등. 돈 있고 권력 있는 이들의 '짝퉁 의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한국 사회는 '진정한 의리'를 그리워하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에 앞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도 '으리' 문제를 겪었다. 의심스러운 선수를 끝까지 지키는, 이른바 '의리기용'을 이유로 언론의 거센 뭇매를 맞은 것이다. 사실 게임 결과야 끝나야 알며, 최고 전문가인 감독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 이면에는 경기 결과나 16강 당락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아는 선수는 그라운드에 세워 끝까지 뛰게 하고,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잘 모른다면 기회도 주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에 팽배한 기회의 불평등과 이로 인한 가난의 대물림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거다.

소수 의견도 무겁다. 우리가 언제는 믿었냐는 거다. 히딩크 감독도 온갖 수모와 비난을 견딘 후에야 역사 속에 명장으로 남았다. 또한 든든한 맏형으로 뛰어줄 거라 기대했던 한 선수는 쌓아온 명성 때문에 서둘러 그라운드를 떠났다. 어쩌면 으리는 그 선수에게 가서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너만 잘 살면 되는 거냐, '우리'라는 소속감은 없냐, 묻고 싶은 국민들 꽤나 많을 거다.

우리 자신은 어떨까. 우리는 흔히 남이 하나를 얻으면 내가 그만큼 손해본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미 세상에 모두 다 같이 잘 사는 방법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남들이 알까 무서워 나만 얻고 떠나버린다. 작은 이익을 좇다가 진정한 '의리'를 저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실제로 숱하게 저지르고 당하고 있다.

이제는 살쪄서 웃긴 아저씨 배우의 '으~리'. 듣기에 시원하고 통쾌하면서도 조금 더 생각하면 종내에는 씁쓸한 단어. 조금씩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의리'의 생존을 위해, 우리 조금씩만 덜 비겁하고, 조금씩만 함께 잘 살면 좋겠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