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자들은 '위험사회'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사실 위험은 인류역사와 함께해 왔다. 홍수, 지진, 가뭄, 허리케인 등 자연재해는 엣날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지구 곳곳에서 자연재해가 발생해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과학 기술발달은 예측을 가능케 해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게 됐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이 위험사회로 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근래에 일어난 9·11테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대표적인 일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해서〉라는 책에서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위험이 닥쳐옴을 경고했다. 산업혁명이후 인류는 유례없는 생산력으로 과잉소비를 하며,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이러한 풍요는 지구환경 위기 등을 내포한 채 위험사회로 치닫고 있다. 최근에는 재난의 반복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직면한 위험사회의 정도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여전히 자연재해는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의 생활패턴은 대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처럼 밀집된 공간에서 수 만 명이 올라가서 사는 구조를 바꿔야한다. 지구를 생명 발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핵시설 등도 하루 속히 폐기돼야한다. 문명의 대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관에 의한 문명의 대전환 외에는 길이 없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저서를 통해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촉구했다. '축소사회'로 나아갈 때 희망의 빛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소비문화는 지나칠 정도로 발달해 가고 있다. 물과 음식, 에너지를 함부로 하는 지금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를 깊이 성찰해야한다. 인도의 오지 라닥에서 교화하고 있는 00교무는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불야성을 이룬 도시를,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보면 염려를 넘어서 두려움이 앞선다 했다. 불야성을 이룬 전기의 대부분은 화약고와도 같은 원전에서 나온다.

대량소비문화, 거대주의 문화에서 소박한 문화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외적 소유의 문화를 버리고 내적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로 전환해야한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금강산을 유람 하던 중에 흐르는 시냇물을 함부로 쓰는 제자를 꾸중한 일이 있다. 우리 원불교인들이 먼저 아끼고, 나누고, 살려 쓰는 문화를 만들어 보은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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