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공심으로 교화에 헌신

가는 곳마다 교도들을 교단불사의 공덕주로 만들고, 마음공부에 진력하게 해서 복혜양족의 인격을 만들어 낸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인 적타원 김대현(寂陀圓 金大現, 1926~2010) 대봉도.

그의 모친인 장타원 최내선 선진은 복 짓고 복 받는 내력을 밝힌 〈대종경〉인과품 29장에 등장한 인물이다. 최내선은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의 인도로 우리 회상과 인연을 맺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익산총부 건설 직전 진안 만덕암에서 초선을 났는데 암자의 안주인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대종사의 제자가 됐고, 무상대도임을 알고 환희용약하여 신앙의 길로 매진했다. 전 가족을 입교 시키고, 총부 주위로 이사까지 하며 정진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천성이 주밀하고 근실했으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0세 무렵 신장염으로 사경을 헤맬 때 그의 모친은 '생불과 인연이라도 맺어 두자'는 심경으로 대종사를 만났다. 대종사께서는 "죽지 않으니 염려 마라"며 '대현'이란 법명을 내려줬다. 이에 용기를 얻어 치료에 전력하자 서서히 회복됐다.

전북여고를 졸업한 그는 도학공부를 하기 위해 언니인 운타운 김조연 교무와 함께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이때 장래 교단의 현대화와 해외교화의 염원을 가진 묵산 박창기 대봉도는 그를 장학생으로 선발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했다. 학교를 마친 그는 구타원 이공주 종사를 도와 성업봉찬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원기40년 부산 서면교당에 부임했다. 교화 중에 선거 후유증으로 교도 상호간의 갈등이 생겨 어려움이 찾아오자 기도일념으로 분위기를 안정시켰다. 이 일로 부처와 중생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일체가 유심조'요, '일체가 유심멸'인 인과의 이치를 확연히 알게 됐다.

원기56년에 돈암교당에 부임했다. 설교에 정성을 다하며 교화를 활성화 시키는 한편, 신축 기성계를 조직해 교당 신축을 위한 기반이 조성될 무렵에 병마가 찾아와 휴무를 하게 됐다. 원기59년 휴무 중에 통영교당으로 발령이 났다. 몸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사심 없이 부임해 '생활 속에 참된 공부인'이 되자는 다짐으로 교화활동을 펼쳤다.

이런 공부심으로 교도들을 복혜쌍족한 청정법기를 이루도록 인도했다. 이런 신념은 중앙훈련원 건축시에 교도들의 합력을 이끌어 거금을 희사하는 등 공부와 사업에 정성을 다하게 했다.

원기62년 신촌교당으로 이동해 교당 신축관계로 지친 교도들의 공부심을 진작 시키는데 주력했다. 원기65년에 부임한 동전주교당에서는 연원교당 개척을 위한 기금조성에 뜻을 모았다. 그러던 중에 영산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교도가 예비교무들이 농사일에 공부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인재양성이 교당 하나 짓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교도들과 상의해 '연원교당 설립 기금'을 현대식 농기구를 구입하게 해 공부시간을 늘릴 수 있게 했다.

다시 건강이 악화돼 서울에서 요양 중에 개포지역에 교당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필생 마지막 사업이라는 각오로 원기69년 전셋집을 얻어 개포교당 간판을 걸었다.

평지조산의 정성심으로 노력한 끝에 원기72년에 신축봉불식을 가졌다. 그는 늘 건강이 여의치 않았으나 종명에 따르며 교화현장을 혈심 혈성으로 일궈낸 헌신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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